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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서구 풍경 3탄,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과 그의 생가


사진으로 보는 서구 풍경 3탄,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과 그의 생가


인천사람으로 검여 유희강을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하물며 그가 태어난 서구에서이랴. '추사(秋史) 이후 서예계의 거봉'으로 추앙받는 검여는 1911년, 오늘의 서구 시천동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진주 유씨 가문으로 그는 전통적인 유가풍(儒家風)의 문한(文翰)을 이어받았다.





"1937년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졸업한 뒤 1939년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의 동방학회(東方學會)에서 서예와 금석학(金石學)을 연구했다. 또한 1943년에는 상하이(上海) 미술연구소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기도 했다.


광복과 함께 귀국하여 이듬해 '인천미술인회(仁川美術人會)'를 결성하고 인천 미술계에서 활동하는 한편, 대동서화연구회(大東書畵硏究會)를 조직, 서화연구의 활성화를 기했다. 1949년 인천문총 창립에 관여하고 6·25 한국전쟁 중에는 표양문(表良文)을 위시해서 신태범(愼兌範), 우문국(禹文國), 이경성(李慶成), 조병화(趙炳華), 이인석(李仁石) 등과 문총구국대 인천지부를 결성하여 활동했다.


1953년 이후 국전(國展)에 출품하여 여러 차례 입상하였으며, 1959년부터는 초대작가와 심사위원이 되었다. 이 무렵 인천시립박물관장으로도 있었는데 같은해 『향토인천(鄕土仁川)의 안내』를 출판해 인천의 고적과 명승, 천연기념물 전설 등을 최초의 단행본으로 체계 있게 간행함으로써 크게 주목을 받았다.


1964년부터는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검여체(劍如體) 서풍(書風)'의 완성단계에 들어가는데, 바로 최고의 절정기라고 할 1968년 불의의 실어증(失語症)을 동반한 중풍이 발병, 오른손이 마비된다. 그러나 검여는 불굴의 예술혼으로 이 같은 좌절과 절망을 딛고 "일체의 기교가 제거된 예술 본질의 좌수서(左手書) 세계를 개척"하는 것이다.





'우수서의 좌절을 극복하여 좌수서로서 불굴의 예술혼을 불태운 인천이 낳은, 서구가 낳은, 걸출한 예술가로서 현대서예사의 기념비적인 발자국을 남긴 인간 승리' 검여 유희강! 그가 태어난 곳은 시천동 57번지였으나 사진의 생가는 안타깝게도 1990년대 중반 철거되고 말았다.


글/시인 김윤식


(자료 : Green 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