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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서구 향토역사순례 12탄, 이간공 신영 신도비를 찾아서



인천 서구 향토역사순례 12탄, 이간공 신영 신도비를 찾아서


오늘날 검단지역은 주거 밀집 지역과 검단 산업단지가 들어선 신도시로 하루가 다르게 변화되고 있어 예전 집성촌 개념의 마을중심의 문화나 향토역사가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이에 검단지역에 현존하는 향토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기록으로 전하는 이번 향토역사 순례는 인천시 기념물 제61호로 지정된 평산신씨 묘역을 소개해 본다.


서구 대곡동 산120-1 번지에 위치해 있는 신영 신도비는 가현산 동쪽 능선에 자리해 있다. 가현산은 김포시 중앙부의 최고봉(215m)으로 주위로 유서 깊은 마을들이 형성되어 있고 많은 유래와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그 가현산의 동쪽으로 자리한 황곡은 대곡동에 속한 자연부락으로 한적한 농촌마을이며 산이 높고 골은 깊어 물이 풍부해 매년 풍년으로 논 전체가 황금물결로 출렁거려 지어진 이름이라 하며, 이곳에는 현재 많은 지석묘(고인돌)가 여러 곳에 산재해 있다.



(사진설명 : 이간공 신도비 앞면, 뒷면 / 자료 : Green 서구)



황곡은 고려조에 단양우씨들이 집성촌을 이루다가 1500년대 초에 단양우씨의 외손인 평산신씨 신영이 입향하여 황곡의 입향조가 되었다. 공의 신도비가 있는 묘역에는 고려 말 진사를 지낸 우석규의 고비가 세워져 있고 진사공의 사위인 이간공 신영의 묘비와 좌측에 신도비가 세워져 있는데 기단부부터 높이 약 3m, 너비 1m정도에 공의 행적과 업적이 기록되어 있으며 글귀는 선조6년(1573년)에 신영의 사위인 관찰사 김계휘가 짓고 글씨는 여성군 송인이 썼다.


신영(申瑛, 1499~1559)은 중종조(1516)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홍문관에 등용되어 벼슬길에 올라 여러 관직을 두루거쳐 한성부 서윤∙이조∙호조∙예조∙병조참판을 10여 년간 지내고 그 후 대사헌∙대사간∙호조판서를 역임했고 말년에 우참찬에 올라 지중추부사에 이르러 사직했으며 사후 이간이란 시호가 내려져 신도비를 세웠다(1573).


공의 비 아랫단에는 이간공 신영의 아들이며 영의정을 지낸 상촌 신흠의 아버지인 신승서(申承緖, 1531 ~1572)의 고비와 문인석, 망주석이 좌우에 세워져있다. 공은 명종조(1558)에 벼슬길에 올라 귀후서 별제를 시작으로 구례현감, 호조좌랑∙예빈시판관∙개성부도사에 임하여 봉직하다 일찍 사망하였고 공의 아들인 상촌 신흠이 의정부 영의정에 올라 공의 직도 증직되어 영의정이 내려지고 원종공신에 책록되는 영광을 얻게 된다.


상촌 신흠은 대곡동 황곡마을에서 태어나 벼슬을 지내다 한동안 이곳 황곡에 초옥인 하루암을 짓고 기거했고 후에 감지와 또는 감지정을 짓고 기거하며 '선천규관'이란 책을 저술하였다. 또한 공의 아들은 선조의 딸 정숙옹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된 동양위 신익성(1588~1644)이다.


황곡의 이웃마을인 태정의 지명 유래가 영의정 상촌 신흠의 자부인 정숙옹주가 이 마을에 살면서 출산했을 때 태(胎)를 마을 뒷산에 묻었다하여 마을이름이 태정(胎亭)으로 불려지다 태정(台亭)으로 되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이밖에 황곡마을에는 오랫동안 마을을 지켜온 각각 500여 년과 200여 년 된 느티나무도 자리하고 있는데, 아늑하고 조용하지만 유서 깊은 대곡동 황곡부락을 찾아 서구의 또 다른 향토역사를 되새겨 보는 발걸음이 많아지기를 기대해본다.


박한준(인천서구문화원장)

자료 : Green 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