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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 서구 향토역사순례 10탄, 문숙공 류사눌 묘역을 찾아서

 

인천시 서구 향토역사순례 10탄, 문숙공 류사눌 묘역을 찾아서

 

인천시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된 문숙공(文肅公) 류사눌의 묘역은 경서동 산 200-1번지에위치해 있다.

 

문숙공 유고집에는 이곳의 지명을“부평부 모월곶면 고잔리 호두산”이라 기록하고 추가로“부천군 서곶면”이라 적고 있다.

 

이 산의 이름은 금산(金山)으로 불려지지만 범의 머리를 닮았다 해서 호두산(虎頭山)으로, 묘역이 자리 한골짜기는 범머리골 또는 범허리골로 불려지고있다.

 

또한 문숙공 유고집의 묘역지도에는 이산을 봉수산(烽燧山)으로도 적고 있다. 묘역에는 문숙공의 아들로 세종때 대마도 정벌 중 순국한 상장군 희생(喜生)의 묘와 공의 형제인 현령, 월곶첨절제사를 지내고 사후에 병조참판에추증된 류갱생의 묘, 그리고 그의 아들로 가선대부 예조참의를 지낸 류경조(柳敬祖)묘와 그의 아들인 선교랑 영석(永錫)의 묘가 자리해 있다. 묘역에는 고비와 문∙무인석이 좌우에 세워져 있고 석물들도 놓여 있다.

 

 

(류사눌 묘역)

 

문숙공 류사눌은 고려말 조선초(우왕1년:1375~세종22년 : 1440)의 문신으로 본관은 문화(文化)이고 자는 이행(而行)으로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숙부 밑에서 성장했다고 전하며 계양산 망일사(望日寺, 萬日寺)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경전뿐만 아니라 문장에도 능했다고 한다.

 

 

공은 16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쳤는데 사헌부 집의를 비롯해 사헌부 좌사간,좌간의 대부, 승정원 좌부대언, 승정원지신사 등의 벼슬을 차례로 지내고 홍주목사, 경기도관 찰사, 함길도관찰사,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세종4년(1422) 한성부윤(漢城府尹) 겸 경기감사, 예문관 대제학, 중추원동지중추부사 등 여러 벼슬을 역임하며 아악보의 서문을 짓고 박연(朴堧)과 더불어 아악보를 정리하고‘용흥가’를 짓고‘신주조회악기’및‘가자(架子)’를 만들었다.


또한 공은 문장에도 뛰어나‘구월산별곡’‘부평망일사시’,‘ 화양정기’등많은시를“문숙공유고집”에 전하며 사후에 왕명으로 문숙공(文肅公)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류사눌 묘지 도면)

 

공의 묘역이 위치한 금산은 고려 때 안남도호부에 속해 계양산 고성, 진포(津浦, 일명 심포) 및 조강(祖江)연안에 군인들을 배치했다고 전한다. 진포군항은 경서동에 남아있는 지명에 보이듯이 해안에서 바라보아도 안 보이고 육지에서 보아도 작은 산들이 둘러쳐져있어 배가 정박해 있는 모습이 비밀스러웠다.

 

금산과 난지도 사이에는 큰 갯골이 있어 육지 깊숙이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밀물 때에는 금산 육지쪽에 큰 배가 정박할 수 있었고 심포리라는 지명이 그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는데 이 갯골을 통해 사깃골에 있던 국가사적 211호인 녹청자도요지 앞까지 배가 닿았다고 한다.

 

또한 금산이 위치한 경서동(경명현의 서쪽마을)에는 난지도의 난지초와 고잔의 사자발쑥(獅子足艾)이라 불려지는 약쑥이 많이 나고 그 효능 또한 최고라고‘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지리지’등에 기록되어 있고 인근에 있던 발아장(發阿場)에서 많이 거래되었으며 중국에까지 그품질이 알려졌다고 전한다. 그밖에도 금산 인근과 일대 해안(포지곶, 뱀섬, 문지도)에는 양질의 소나무가 많아 양목지(養木地)로 정해져 영조17년(1741)에는 궁궐을 지으려 당시 부평부 관할 주민이 동원되어 출역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근래 들어 해안의 간척과 도시개발로 인해 집단 서식지는 없어졌지만 이곳에는 천연기념물인 두루미가 둥지를 틀고 서식하는 모습을 현재도 볼수있다.

 

조용하던 이곳 경서동 류사눌 묘역 인근 지역도 최근 도시개발로 인해 지명뿐만 아니라 그 시대적 중요성을 간직한 역사와 문화가 점차 희미해져 가는 시점에 향토에 대한 정체성 확립의 중요성을 상기하고자 관련 자료들을 정리해보며 앞으로도 더욱 많은 향토사가 발굴, 보완되어지기를 기대해본다.

 

 

박한준(인천서구문화원장)

자료 : Green 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