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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 서구 향토역사순례 6탄, 가정지를 찾아서


인천시 서구 향토역사순례 6탄, 가정지를 찾아서


부평부읍지(富平府邑誌) 고적조(古跡條)에 가정(佳亭)은 석곶면(石串面)에 있으며 개국공신인 복흥군(復興君), 숙위공(肅魏公) 조반(趙伴:1341~1401)의 별업(別業:별장)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 있던 별장의 건립 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태조4년~ 정종2년(1395~1400)에 정자를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또 다른 문헌에는 조반이 가정에 정자를 짓고 기거한 이유로 이곳이 외가(합천이씨)의 고장이기 때문으로 보고있다. '부평부읍지'에 따르면 조반의 아들 경은공(耕隱公) 조서강(趙瑞康:1394~1444)이 이조참판(吏曹參判)을 그만 두고 말년에 이 곳으로 퇴휴(退休)하여 시와 노래를 읊으며 은거를 하고 있을 때 세종(世宗)께서 누차에 걸쳐 학서(鶴書:선비를 부르는 왕의 조서)를보내 출사하도록 권유하였지만 끝내 응하지 않았으므로 화공(畵工)을 보내어 그가 은거하는 곳을 그림으로 그려서 바치게 했다. 그 후 가정(佳亭)이 한때 명사와 선비들의 시제(詩題)에 자주 오르게 되었고 과거시험의 시제로 부평에 있던 '자오당지(自娛堂址)'와 함께 제시되어 선비들 사이에서 이 지역의 지명유래에 대해 관심이 높았다고 한다.





이렇게 된 연유에는 세종의 삼자(三子)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이 가정의 그림에 시(詩)를 모아 '석호가정별업도'(石湖佳亭別業圖)란 화첩을 만들어 왕에게 바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에도 여러 문헌에 가정에 대한 시를 남긴왕사(王使)로 안평대군, 정인지, 이경석, 황정혹 등의 시가 전해지고 있으며 조서강의 가정시(佳亭詩)는 현재"가정지표지석" 뒷면에 실려 전해지고 있다. 이 시에도 가정의 아름다운 모습이 잘 함축되어 있다.






"가정지"는 서구 가정동 456번지에 표지석 '가정터'가 세워져 있지만 당시에는 마을 안산의 정상에 자리해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서쪽으로는 바다가 보이고 남쪽으로는 넓은 농지의 평지가 시원스레 펼쳐져 있던,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근래 들어 도시계획에 의해 산은 없어지고 평지의 표지석만이 남아 있다. 이 표지석 뒷면에는 조서강이 만년에 시와 노래를 읊으며 은거하던 시절의 시(佳亭詩) 한수가 새겨져 있는데 이 글씨는 서구 지역 출신으로 추사 이후 대한민국 대표 서예가로 칭송되고 있는 검여(劍如) 류희강(柳熙綱:1911~1976) 선생이 썼다. 일설에 의하면 과거시험에 '가정별업도'에 대한 시제가 제시되어 시천동에 사는 진주류씨 집안의 한 선비가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에까지 올랐다는 내용이 '문화재대관'에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가정지가 위치했던 지역은 원적산(과거 철마산)에서 발원한 가정천(佳亭川)이 축곶산을 돌아 서해로 흘러 들어가는 갯골로 현재에는 모두 복개 되어 그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옛시에 표현되기에는 어선이 정박해 있는 모습이 한가롭다 했고 서남단에는 환곡을 보관하는 창고였던 "환자고(還子庫)"가 있어 "환자곶말"이라는 지명도 전해진다. 또한 이곳에는 바다로부터 육지에 이르는 갯골이 있었기에 부평연안의 방비를 위해 구축했던 연희진 소속 "가정포대지"와 "원창포대지"가 존재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재 가정지가 있었던 곳에는 표지석만이 외로이 그 옛날 정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하여 줄 뿐 아름다운 경치를 관망했을 장소는 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고 최근에는 '루원시티'조성으로 표지석도 울타리가 설치되어 있어 쉽게 찾아 볼 수 없어서 더욱 아쉬움이 크다.


이렇듯 현대화와 도시화에 밀려 신도시가 들어서게 되면 부득이 그 이면으로 과거의 흔적이 하나, 둘 사라지는 어쩔 수 없는 안타까움에 그 유래만이라도 지역주민들이 바로 알기를 바라는 마음에 '가정지'에 대한 기록을 정리해본다.


박한준(인천서구문화원장)

자료 : Green 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