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 사이 feat. 블로그기자단

인천 서구의 위인 '류사눌 묘역'을 다녀왔습니다.


인천 서구의 위인 '류사눌 묘역'을 다녀왔습니다.


인천공항으로 가는 도중 항상 눈에 들어오는 사적지 '류사눌의 묘'의 표지판!

대체 어떤 분일까?? 하면서도 그냥 스쳐 지나가기만 했었는데요

드디어 그분의 묘역을 찾아 나서보았습니다.





안내된 방향으로 들어갔지만 생각만큼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아 주변에 계신 분에게 여쭈어보았는데요.

처음 류사눌 묘역을 방문하시는 분들은 들어가는 입구가 

확실히 표시가 돼있지 않으니 당황할 수도 있겠더라고요^^


가리킨 방향으로 걸어가 조성된 묘역을 만나니 바로 '류사눌 묘역'입니다.

류사눌 묘역은 인천광역시 시도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된 곳이기도 합니다.





그럼 인천 서구의 위인 류사눌(柳思訥)은 어떤 분일까요?


류사눌(柳思訥, 1375~1440)의 자는 이행(而行), 

본관은 문화(文化)로 문화 류씨의 중시조이자 우의정 류관(柳寬)의 조카이기도 합니다.

류사눌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숙부인 류괸 밑에서 자랐고 태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이후 강원도와 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하였고 세종 때 예문관대제학이 되었습니다.

특히, 세종 때 악학제조(樂學提調)를 겸직하면서 박연과 함께 아악(雅樂) 정리에 크게 기여하였던 

인물로 유명한 분이신데요. 세종은 아악정리에 큰 공으로 동지중추원사 류사눌과 

상호군 박연에게 안장 갖춘 말을 하사하셨다고 합니다.




류사눌은 문장에도 뛰어나 '구월산별곡', '부평말일사지' '화양정기'등의 많은 시를 지었다고 하는데요.

사후에 세종은 류사눌이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의미의 문(文)과 

마음잡아 결단하는 모습을 보고 숙(肅)이라 하여 문숙공(文肅公)의 시호를 내렸다고 합니다.



서구의 위인 '류사눌'이 지은 '부평망월사시(富平望月寺詩)'를 한번 담아 보았습니다.



일찍이 이 절에서 동몽선습 익혔거니            이처럼  늙으리라 생각이나 했던가.

대웅전 부처님은 옛날 그대로인데               노승들은 그 얼굴이 아니로구나


바다는 낙조를 머금어 황금빛같이 곱고         산들은 백옥 같은 아지랑이 둘렀구나


해 저무는데 갈 길은 아득하고                   다락에 기대어서 만감수심 그지없다.






류사눌의 묘역이 있는 산은 금산 또는 호두산, 봉수산으로 불렸는데요

병인양요 후 이양선의 침몰이 빈번해지자 이곳에 망루와 봉수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접했기에 고려시대에는 수군기지가 있었던 곳으로

예전에도 군부대가 있었다고 부근의 어르신이 말씀해 주셨는데요. ​

부근의 국제골프장은 매립이 되기 전까지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포구였고 

근처의 난지도란 일컬었던 섬이 있었다고 합니다.





난지도(蘭芝島)는 부평팔경중의 하나로 난지초가 그렇게 유명했다고 시에서도 읊었다고 합니다.


蘭浦靈葉에서 '난포'는 북인천 IC와 경서동 사이에 있던 난지도 포구로 

난지초의 자생지였기에 붙여진 이름인데요. ​난지도는 만병통치약으로 명성이 높았었던

'난지초의 자생지'라 하여 붙여졌습니다. 


이 풀은 부여의 고란초와 같이 희귀한 식물로 고란초는 강가 벼랑에서 자생하는 반면,

난지초는 바닷가 산비탈에서 자생하였다고 합니다.






이제야 궁금했던 서구의 위인 류사눌(柳思訥)이란 분의 업적과 

묘역 주변의 위치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았다는 사실에 만족감이 드는 하루였습니다.



그러면서 궁금하기만 여겼던 난지도에 대해 

더욱 깊이 알게 되었으니 더욱 보람을 느끼게 만든 날인데요.^^


멀게만 느껴졌던 위인이 인천 서구에도 존재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는데요.

아이들과 친구들과 인천 서구의 모습을 하나씩 알아가는 역사 위인 탐방을 해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