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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 서구 향토역사순례 37탄 <광명(光明)마을 느티나무>




인천시 서구 향토역사순례 37탄  <광명(光明)마을 느티나무>



광명마을은 서구 당하동의 제림산(濟林山,98m)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밝다’라는 의미를 차용한 한자어 광(光), 명(明)의 지명에서 나타나듯이 예로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괭맹이’,‘ 광메이’,‘텃굴’,‘ 느티나무말’,‘ 본동’으로 불려지기도 했었다.


과거 독립적인 법정동이 된 적은 없었으며 당하리에 속했던 자연부락으로 크게 광명과 ‘매밭’으로 구성되어 현재는 검단 3동에 속해있다. 이밖에 이 마을의 소지명으로‘ 솔터구석’,‘ 청룡부리’,‘ 마루터모퉁이’ 등이 있는데 유서 깊은 전통을 간직한 곳임을 추정할 수 있다.


이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초이튿날 새벽에 제림산(김묵산, 기밋산, 제미산) 산마루에 천막을 치고 산고사를 지내왔다. 당시 산 정상 부분에 당우물이 있었고 제물을 차리기 적당한 바위에 제단을 차려 전통의 제례를 지냈는데, 당시 제의일에 맞추어 이곳 우물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고 새 물로 조라술을 담근 뒤 제단 밑에 묻고 터줏가리를 씌워 놓았다가 사용했다고 한다. 이때 제의형식은 유교식 절차에 따라 산고사를 지냈는데 마을의 평안과 재해 방지, 농사의 풍작 등을 기원하며 축원문을 낭독하고 엄숙하고 경건한 과정 속에 치러졌다. 큰 산고사에서 마을공동의 축원문 소지를 비롯해 주민 각자의 소원지를 올리고 내려와 마을에 준비된 작은당(마을회관 앞 느티나무)에서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함께 절을 하며 다시 한 번 제의를 드렸다. 이곳에서도 제의가 끝나면 여느 마을과 마찬가지로 준비한 술과 음식을 마을 주민들이 골고루 나누는 음복(飮福)을 하고 그와 관련한 다양한 문화의 장이 펼쳐졌다. 이 마을의 산제사는 그 역사가 오래 되었으나 한국전쟁 시기에는 일시 중단되었다가 다시 시작되어 최근(2011년)까지 이어져 왔었다.


이 마을의 작은당인 느티나무는 1982년 10월 구 보호수(4-8-5)로 지정되었는데 이 나무는 3백여년 전 인근 대곶면 약암리에서 살던 청송심씨들이 이주하여 1647년 4월에 식수를 했다고 전해진다. 지난 300여 년 동안의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 나무는 수형이 매우 아름답고 사계절의 특색이 뚜렷하다.



그 높이가 약 20m이고 둘레가 약 4.8m에 이르는 이 노거수 느티나무 외에도 마을 원로의 증언에 의하면 이 마을에는 몇 그루의 느티나무가 더 있었다고 한다. 그 중 하나에는 효자정려(심한성,1653~1738)가 내려졌는데(고종 14년, 1887년) 지금도 인근 정려각에는 ‘효자병절교위심한성지려(孝子秉節校尉沈漢成之閭)’ 라는 현판이 현존한다.


예조에서 입안(立案)을 내린 이후, 한때 많은 문신들이 이곳을 찾아 시문을 남겼는데, 효자 심한성이 부모에 대해 극진한 예를 갖추고 효성을 다했다는 내용들이며 이와 관련한 많은 시문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1919년 전후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195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은 심영택(沈永澤, 1869~1949)도 이 마을 출신이었다.


이렇듯 이곳 광명마을은 부모에게 효성을 다한 인물과 나라를 위해 온갖 시련을 이겨내며 독립운동을 한 인물을 배출한 자랑스런 역사와 전통을 이어오며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마을이지만, 머지않아 신도시가 들어설 예정이어서 혹여 전승되어 온 향토문화가 훼손될까 염려스럽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는 말도 있듯이, 300년이 훌쩍 넘게 주민들과 희노애락을 함께 하며 묵묵히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해오고 있는 느티나무 노거수 밑에서 잠시나마 저마다의 오늘을 되돌아보는 힐링의 시간을 가져볼 수 있기를 기대하며 충효의 전통을 간직한 당하동 광명마을의 느티나무를 소개해본다.






Green서구 제213호

박한준/인천서구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