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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서구 향토역사순례 20탄, '밀양당씨(密陽唐氏) 정렬비(貞烈碑)'를 찾아서





인천 서구 향토역사순례 20탄, '밀양당씨(密陽唐氏) 정렬비(貞烈碑)'를 찾아서




검단사거리에서 김포시청 방향으로 가다보면 태정(台亭, 胎亭)마을을 만나게 된다.

'태정'이란 마을지명은 조선시대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영의정을 지낸 상촌 신흠(申欽)의 아들로 선조의 딸 정숙옹주와 결혼하여 부마(임금의 사위)가 된 낙전당 식익성(申翊聖)이 황곡에 기거할 때, 자제의 태(胎)를 뒷산에 묻었다 하여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한다. 인근에는 영의정을 지낸 학역재 정인지(鄭麟趾)와 공의 아들로 역시 세조의 부마였던 하성균 정현조(鄭顯祖), 그리고 세조의 딸인 그의 부인 의숙공주를 기리던 사당도 있었다.






이곳 대곡동(大谷洞)은 현재 행정동으로는 검단2동에 속하고 인근에는 두밀, 황골, 설원, 태정의 옛 지명들이 전해지며, 청동기시대 선사문화유산의 대표적인 상징물인 고인돌이 대거 운집해있고, 산세가 수려하여 과거부터 유명 문중들이 터를 잡고 집성촌을 이루어왔으며 현재에도 논과 밭이 그대로 남아있어 도심 속 농촌으로 잘 보전되고 있다.


그중 두밀부락에는 1712년에 세워진 반남박씨 문중의 충숙공 박정(朴政)과 전헝공 박동선(朴東善)의 신도비도 보존되어 전해지고 있다. 두밀부락은 신도비에는 '두모곡(杜毛谷)'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양달말의 밀양당씨 묘비에는 '두곡리(杜谷里)'로, 박남박씨 문중에 전해지는 자료에는 '밭두밀'이란 지명으로도 등장한다. 예로부터 인심 좋고 예의를 숭상해 범죄 없는 마을로 지정되기도 하였던 이곳 두밀부락에는 수령 500여년의 은행나무와 200여년 된 느티나무가 현존하고 있고 정감이 깃든 옛 소지명들(밭두밀, 분틀메, 한메, 안삼메, 달안메, 감두리산, 다머리산, 버들고개산, 가마논, 말무덤, 청룡부리, 노레이모퉁이 등)을 비롯하여 산이 많은 만큼 외부와의 통로였던 고개들(달안메고개, 버들고개, 옹주물고개, 양알고개, 방석재, 황굴고개, 두밀고개, 외밀고개, 아랫말고개 등)의 지명도 전해진다.


이렇듯 조용하고 한적하지만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두밀부락의 양달말 뒷산인 계봉산(鷄鳳山)에 밀양당씨묘와 정렬비가 있는 비각(碑閣 : 비석을 보호,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건물)이 위치해있다. 망주석이 좌우로 세워져있는 입구 계단을 오르면 묘역이 자리하고 그 옆에 비각이 세워져 있는데 이 비는 밀양당씨(1811~1890)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비문으로 이 분의 본관은 밀양이며, 김포에서 태어나 두밀의 반남박씨 박종주(朴宗柱) 거사(居士)의 처사 되었다. 1867년 7월, 남편이 중병에 들어 자리에 눕자 부인 당씨는 남편을 위해 의장을 풀지 않고 식음을 전폐하며 성심을 다해 몸소 약을 달여 복용케 하는 한편, 정화수(井華水)를 떠놓고 밤낮으로 하늘에 빌며, 남편을 대신하여 자신이 죽기를 기원하였으나 남편의 병세는 날로 위중하여 혈맥이 다하고 숨이 끊겨 회복할 가망이 없어 임종을 기다리며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자신의 오른손 무명지(無名指)를 잘라 피를 내어 남편에게 먹이니 남편의 의식이 되살아났다고 한다.


이에 많은 이들이 부인 당씨의 열성에 하늘이 감동하였다고 기뻐하며 이와 같은 훌륭한 선행을 칭찬하고 칭송하였는데 향교의 유생(儒生) 이병봉(李炳鳳), 심양지(沈亮之), 이병조(李炳祖) 등 62명이 연명하여 광서 8년(고종 20년, 1882) 이를 세상에 널리 알려 군민들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선정을 베풀어 줄 것을 당시 김포군수인 조준구(趙俊九)에게 상소하여 경기감사에게 보고되고 정려(旌閭 :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는 정문(旌門)을 그 마을에 세우는 것)를 내려 표창하게 했다.


예전에는 특별한 선행이 있는 부녀자들에게 정(貞), 열(烈), 절(節), 효(孝)라고 하였는데 정려(旌閭)를 세워 이를 반듯이 표창하는 것이 성대한 의식이었고 선비의 공의(公議)인 것으로 여겼다.


이 곳에 현존하는 비각과 비는 1924년, 손자인 박제준(朴劑駿)이 글을 짓고 박제정(朴劑定)이 글을 썼다. 문헌 기록으로는 '경기인물지', '김포군지'에도 기록이 있는 비(碑)의 전면에는 "통정대부반남박공종주처숙부인밀양당씨정렬비(通政大夫潘南朴公宗炷淑夫人密陽唐氏貞烈碑)"라고 기록되어 있다. 남편인 박종주 공(公)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는 등 문한과 덕업이 높았고 공의 세 아들도 벼슬에 나아갔으나 조정의 난정(亂政)을 피해 모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고 전한다. 기존의 비는 오랜 세원에 훼손되어 온전히 해독할 수 없었는데, 6.25사변 때 완전히 파손되었다가 후손들과 종친들에 의해 새롭게 비문을 세웠다고 전한다.


비단 이곳뿐만 아니라 서구지역에는 효자와 열녀, 충신 등으로 표창받아 후세에 길이 귀감이 되는 인물들이 많이 전해져 오는데, 현대를 사는 윌들에게 귀감이 되고 시사하는 바가 큰, 지역 인물들의 행적을 되새기며 본받아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밀양당씨 정렬비'를 소개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