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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서구 향토역사순례 16탄, 계북 류태동을 만나다


인천 서구 향토역사순례 16탄, 계북 류태동을 만나다


아라뱃길이 열리면서 시천동의 옛 모습이 많은 변화를 맞이했다. 예전에 서구에서 목상동으로 넘어가던 고갯길에 자리해 나그네의 안녕과 시름을 달래 주던 성황당도, 시천동 마을을 지나 장기리로 넘어가던 도로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또한 시천동 마을 안에는 300년 이상 된 보호수(느티나무∙은행나무∙산수유나무 등)들이 마을의 역사를 대변해 주고 있었지만 물길이 열리면서 인근 시천교 밑 공원으로 이전하여 어렵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곳 시천동의 자연 취락은 시내 본 마을과 점말(店村), 안골, 윗말 등 크고 작은 네 개의 마을이 합쳐져 시천리(始川里)가 되어 마을이 형성되어 왔다. 이 마을은 오룡산(五龍山)의 큰 줄기가 마을 뒷산에 자리하고, 마을 앞에는 계양산이 펼쳐져 있는데 이곳에는 진주류씨들이 선주성씨(先住姓氏)로 집성촌을 이루었고 현재도 많이 기거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시천동은 인근 검암동, 공촌동과 더불어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구슬원'이라는 여관촌과 '구슬역'이라는 역마를 관리하던 곳이 있었을 만큼 개성이나 삼남지방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으로서 옹기를 팔던 '점촌'이란 지명이 남아 있고 고잔(쑥데이고잔)의 한약재로 쓰이는 '사자발쑥'이 유명해 거래가 왕성했었다고 전한다. 이는 이곳 시천동이 바닷가와 인접했었고 큰 갯골이 마을 앞까지 연계되어 있어 가능했으리라 본다. 후에는 인근 백석동에 한들방죽이 축조되며 육지로 변해갔다. 인근 검암동의 바라뫼마을(상동)에 있었던 '장모루', 공촌동의 '고련'이라는 고려 때의 명칭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한때 번성했던 곳으로 거문고와 비파를 타며 격구경기를 했었다고도 전하며 '황허장'이 생기기 전까지 이 일대에는 커다란 장터가 있었다.


이러한 지형적 생활터전이 오래 전부터 형성되었던 곳인 시천동에는 조선 말기 때 대사간을 지낸 '류태동'이란 인물을 기점으로 문중에 많은 문인들이 배출되었고 그들이 남긴 문헌들 또한 여러 권 전해오고 있다. 특히 추사 김정희 이후 최고의 서예가로 칭송되어 오는 '검여 류희강'을 비롯해 독립운동을 했던 '류종무'등의 인물들이 있었다.


이번 호에서는 계북 류태동(1792~1864)에 대해 문헌과 원로들의 고증을 통해 살펴봄으로써 지역의 향토인물이 현대를 살아가는 지역주민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1792(正祖16)년에 시천동에서 출생한 공(公)은 헌종 3년(1837)에 3년 마다 정기적으로 치러지던 전시문과 병과에 급제했다. 당시 41인이 급제를 했는데 이때의 시제가 '석호가정별업도'(石湖佳亭別業圖)였다.


공(公)이 시에서 표현하였듯이 '가정'에는 바닷가의 아름다운 마을이 잘 표현되어 있는데, 세종조 때 안평대군과 여러 관직의 선비들이 가정의 아름다움을 글과 그림으로 그림첩을 만들어 임금에게 바친 것을 계기로 유명해졌고 그것을 시제로 과거시험을 치루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컸다고 사료된다. 공(公)은 시제에서 정자의 아름다움과 안개 낀 노을과 피리 부는 목동, 낚시를 즐기는 모습, 관직에서 물러나 거문고와 독서를 즐기며 한가로이 지내는 선비의 모습을 표현했으며, 지역의 허암산에서 주역을 읽던 인물을 회상하며 지역의 자연풍광과 정자의 풍물이 찬란함을 기록했다.



(사진 : 문관중시 급제[가봉부])



공(公)은 과거에 급제한 후 홍문관교리, 수찬, 지제교겸경영원 검토관, 춘추관기사관 등을 거쳤고 철종 7년(1886)에 문무관 중시에서 '가봉부(歌鳳賦)'를 제출해 문과 5명 안에 들어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고 승정원 우부승지, 사간원대사간, 영흥부사를 거쳐 호조참의를 지냈지만 성품이 곧고 직언을 많이 해 한때 '지도'라는 섬으로 귀양을 가기도 했다. 문중에 전해오는 한시작품중에는 '계양화시', '명월사시', '화산시' 등에서 지역의 지명들과 풍광이 잘 표현되어 전해지는데 이를 보노라면 "산천은 유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다"란 구절이 절로 생각난다.


옛 선인들이 남긴 글과 그림에서 고장의 옛 풍광을 접할 수 있고 과거시험에 시제로까지 채택되었던 가정의 아름다움을 글로 대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서구지역의 옛 모습을 회상해보는 여유를 모두 가져 보면서 향토애를 느끼고 자긍심 함양에 기여가 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가져본다.


박한준(인천서구문화원장)

자료 : Green 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