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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서구, 만나고 싶은 서구

사진으로 보는 인천 서구 풍경 13탄, 연희포대지


사진으로 보는 인천 서구 풍경 13탄, 연희포대지


연희포대(連喜砲臺)는 연희동 서쪽 용두산에 위치했다. 용두산은 연희동 서쪽으로 뻗어 가던 산줄기가 바닷가에서 뭉치듯 섰는데, 그 형상이 마치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연희포대를 달리 용두포대라고도 부른 것은 이 산 이름 때문이었다.


이 포대는 당시 일본이 인천 앞바다에 나타나 수로와 해류를 측량하는 것을 보고 서울의 인후지지(咽喉之地)인 인천을 개항지로 요구할 것에 대비해 정부가 서둘러 화도진(花島鎭)과 연희진(連喜鎭)을 설치하면서 세워진 것이다. 화도진이 기왕에 설치되어 있던 영종진과 더불어 강화수로의 입구를 지키는 포대였다면 연희진은 강화 수로로 올라가는 중간 연안을 방어하는 포대였다.





개항 직전인 1879년 7월 1일에 어영대장 신정희(申正熙)와 강화 유수 이경하(李景夏)에 의해 완공된 이 포대는 '한국고지도'에도 인근의 다른 여러 포대들과 함께 그려져 있다.


연희포대는 본래 인천 앞바다를 바라보며 3좌의 포대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서구사'의 기록에도 '연희포대는 포리(원창동)에 2좌, 봉우재(가정동)에 1좌가 있었다'고 적고 있다. 아쉽게도 오늘날 포좌는 모두 사라지고 사진처럼 축대를 쌓았던 돌무더기 흔적만 용두산과 봉우재에 남아 있다.


그해 11월에는 연희진과 화도진에 부근 1개 면을 각각 이속시켜 독자적인 진으로 만들었지만, 임오군란 직후인 1882년 6월 28일 화도진은 서울의 훈련도감으로 이속시키고 연희진은 폐지하고 말았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포대는 연희진이 폐지된 뒤에 일단 화도진 관할로 넘어갔다가 다시 개항 이듬해인 1884년 부평부에 경기, 충청, 황해 3도 수군을 통할하는 기연해방영(畿沿海防營)을 설치했다가 다음해에 다시 서울 용산 만리창기지(萬里倉基址)로 옮기면서 포대 관할권도 그리로 옮겨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 말, 풍운 가득한 나라 운명과 함께 세워졌다가 또 나라의 운명과 함께 최후를 맞았을 연희포대지. 인천은 물론 서울을 방비하는 요충이었던 서구의 연희포대지 사진 한 장이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과연 무엇일까.


김윤식/시인

자료 : Green 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