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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 feat. 블로그기자단

인천 서구 위인을 찾아, 검여(劍如) 유희강(柳熙鋼)


인천 서구 위인을 찾아, 검여(劍如) 유희강(柳熙鋼)


서구의 위인을 찾아서 이번에는 검여(劍如) 유희강(柳熙鋼)의 흔적을 찾아가 보려 합니다.


서구 서곶의 시천동의 시시내마을에서 출생한 그는 대사간을 지내 류태동, 애국지사 류완무 등과 함께 서구의 명문 가문이었는데요. 일제시대에는 중국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서예와 금석문을 공부한 대한민국 최고의 서예가였습니다.


유희강의 출생지는 현재 경인아라뱃길의 매화공원 터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곳에 찾아가면 검여 유희강 선생의 친필과 그림을 만날 수 있는데 처음에는 그저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게 사실이지만 그분의 삶을 배우는 계기가 되어 다시금 그분이 업적을 좀 더 알렸으면 하는 바람으로 검여의 삶을 이야기해봅니다.






광복 후 국전 초대작가와 심사위원을 지내면서 인천예술인협회를 중심으로 활동한 그는 인천의 문화를 부흥하는데 온 힘을 바쳤다고 합니다. 특히그는 한국 서예계에 큰 족적을 남겼던 분으로 뇌출혈이 일어나 오른손이 마비되었지만 좌수(左手) 서예를 위한 치열한 정련 끝에 마침내 오른손 서예보다 더 깊어진 예술세계를 보여 주었던 분입니다. 서예 전문가들은 검여 유희강의 초기 글씨는 웅건(雄健)이라고 만년의 좌수서는 청경(淸勁)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육서 글씨에 모두 능통했던 검여 유희강은 특히 육조체의 해서를 잘 썼다고 합니다. 그의 작품들은 기획전시가 없는데다 소장가들이 소중히 보관하고 있어 일반인은 보기가 힘든데 오히려 사찰 편액에서 그분의 글씨를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수원의 <용주사>, <경기제일가람용주사>, <범종가>  해인사의 <범종루>, <사운당>의 편액이 등이 전하고 있습니다.







고혈압으로 쓰러져 몸이 불편한 상태에서도 계속 정진하여 왼손으로 경지에 이르른 검여 유희강 선생은 정말 대단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서구에 이렇게 유명한 분들이 사셨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앞으로도 인천 서구의 위인들에 대해 더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