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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 서구 향토역사순례 41탄 <바름이 마을의 구슬원(球瑟院)>





인천시 서구 향토역사순례 41탄 <바름이 마을의 구슬원(球瑟院)>




구슬원은 지금의 검암동 지역에 설치되었던 역원(驛院)이다. 원(院)은 공무로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곳이었다. 구슬원이 기록에 처음 보이는 것은 1530년에 편찬된 瑟院) (부평)부의 북쪽 10리 되는 곳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은 1656년 기록인 에도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1871년 기록인 10리 되는 곳에 있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구슬원은 역원제도가 도입된 시기에 설치되어 운영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역과 원의 운영체제가 유명무실해지는 과정에서 폐쇄되고 구슬원의 이름을 딴 점(店, 주막)으로 변한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지금의 서구를 아우르고 있던 부평에는 금륜역이 있어 구슬원과 함께 중앙과 지방의 공문서 전달, 공공물자 운송, 사신 왕래에 따른 영접 및 숙박 제공 등을 담당하고 있었다. 금륜역에 대한 기록은 구슬원과 마찬가지로 국여지승람』이 처음으로, 지도서』 모두 부평도호부의 북쪽 13리 되는 곳’으로 기록하고 있어, 현재의 계양산 북서쪽에 위치한 것으로 볼 수 있 다. 



1871년 『부평부읍지』의 금륜역과 구슬원 기록(가운데)



그러나 1842년 편찬한 ‘부평도호부와 1리 거리에 있다’고 하여 그 위치를 읍내로 이전하여 구슬원과는 달리 계속 운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한편 검암동(검바위)에는 옛 지명에 개’와 이 고개(발아현)’가 있었다. 일명 작은 고개’로 불려지는 곳인데 이 고개는 고려 때 개경으로 통하는 큰 길목이었다고 한다. 이곳은 ‘큰 징매이’에서 가 하나 없는 첩첩산중이었다. 지금의 검암동의 상동(上洞)은 과거에는 왔는데 이곳에 로 마을 이름이 변화되어 불려온 지명이라고 전해진다.  장’은 고려 때부터 재와 우시장으로 유명하였다. 조선후기, 현재 계양의 일대에서 가장 번창한 시장이었다. 이곳에는 었고 이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글이 전한다. 즉 “桂陽山下 侵具女 己酉年鵬 頭怨無心(계양산 아래 구씨 처녀를 침범(사랑)하면 기유년 과거에 낙방해도 원망하는 마음이 없다)”라는 글인데, 고려 말 전라도의 선비가 개성으로 과거를 보러가다 이곳 랑에 빠져 과거시험에 낙방하였다는 것이다. 이 글은 당시 과거 길에 올라 이곳을 거쳐 가는 선비들에게 교훈처럼 전해졌다고 한다. 구슬원의 기록은 1530년 발간된 여지승람』 이후 1871년 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과거 호서, 호남의 선비들이 송도로, 한양으로 왕래하던 길목으로 번창했던 위치였었지만 현재는 그 흔적 하나 없이 일부 기록과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이곳 검암동(상동) 구슬원’의 이야기를 지역의 향토문화 전승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정리해본다. 





Green서구 제217호

인천서구문화원 원장 박한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