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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서구 향토역사순례 35탄 <세어도의 김첨지(金僉知)나무를 찾아서>






인천 서구 향토역사순례 35탄 <세어도의 김첨지(金僉知)나무를 찾아서>



  인천 서구는 1980년 1월 공유수면 매립공사를 착공, 1991년 1월 준공됨에 따라 관할 부속 도서가 대부분 사라지고 서구의 유일한 유인도로 남아 있는 세어도(細於島)는 밀물과 썰물 때에도 바닷물이 머무는 큰 갯골(염하수로, 세청개)이 있는, 뭍에서 조금 떨어진 섬이다. 섬의 형태가 가늘고 길게 늘어선 모양을 하고 있어서‘ 세어도’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하며 또 다른 이름으로‘ 여지도서’에는 ‘세루’ 또는 ‘서천도(西遷島)’라는 별칭도 있고, 한자 뜻 그대로 ‘서쪽에 멀리 머물다’의 뜻으로 ‘서유(西留)’라고도 불렸다. 그 외에도‘ 광여도’나 ‘지승’에는‘ 서일도(西日島)’로 등재되기도 했다.


  세어도의 관할은 호구총수(1789) 기록에 고잔리(현 경서동) 소속에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부천군의 신설로 부평부 모월곶면과 석곶면이 하나로 통합될 때까지도 고잔리로 존속되어 오다가 1917년 포리(현 원창동)에 소속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섬으로의 왕래는 기존에 만석동에서 행정선인‘서원호’가 오전에 물때에 맞추어 만석동에서 출발하여 40여 분이 소요됐고, 오후에도 물때에 맞추어 섬에서 출발하는 것이 유일했었다. 하지만 최근에 아라뱃길이 열리면서 정서진 인근 안암도에 선착장이 생기고‘ 정서진호’로 이름이 바뀐 행정선이 하루 한차례 세어도를 운항한다. 이곳에서는 섬이 바로 지척에 있어 10여 분이면 염하수로를 건너 세어도에 도착을 하지만 아직은 이곳 선착장까지의 교통편이 원활하지 않은 실정이다.





  세어도의 생업은 어업으로 봄철에는 새우와 준치를, 여름철에는 농어와 숭어를 잡았고 가을철에는 망둥어가 많이 잡혔다. 1960년대에는 어업의 전성기로 한때 6척의 중선이 있어 충청도 일대까지 내려가 준치잡이를 했다고 한다. 그 당시 섬에는 어업이 활성화되어 청년들이 많아 예비군장병이 30여 명에 분교 학생도 30여 명으로 꽤 많았다고 한다. 또한 민어잡이를 위해 덕적도와 연평도 사이(사루바다)까지 나가 어로활동을 했었고 인근 영종도와 월미도 앞 작약도 일대에서는 숭어를 많이 잡았는데 당시의 배는 바람의 힘에 의지하던 풍선배로 1980년대에는 20여 척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밖에도 썰물이 되면 마을의 아낙네들은 갯벌에서 가무락, 쏙, 소라, 맛 등을 채취했다고 한다.


  이렇듯 세어도의 주된 생업은 어업이었기에 출어에 앞서 만선과 무사 귀환을 비는 제의(祭儀)를 지내왔는데 마을의 당재인 소나무숲 외에도 섬의 선착장에서 마을로 오르는 자그마한 언덕 왼편에‘ 김첨지나무’라고 별칭을 붙여 놓고 출어를 시작하는 정월그믐날이나 어로활동을 나갈 때마다 떡·술 등의 제물을 마련하여 만선과 무사귀환을 빌며 제를 지내던 단풍나무과의‘ 고로쇠나무’ 한 그루가 아직도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현존해 있다.


  수령이 200여 년 가량 되어 보이는 이 나무는 그 둘레가 약 3m 남짓이며 높이는 12m 정도이다. 현재처럼 첨단장비를 갖추지 못한 풍선배로 자연현상에 크게 의지하였던 예전에는 마을의 노거수들이 주민들의 정신적 지주목 역할을 했었다고 사료된다. 현재 세어도는 번성했던 예전의 어로활동은 많이 사라졌지만 11척의 작은 어선이 있어 소규모의 어업은 유지되고 있다.


  그동안 세어도는 개발제한지역으로 묶여 있어 육지와의 왕래가 불편했던 이유로 개발이 전혀 되지 않았던 섬이었지만 앞으로 자연환경을 훼손하지 않고 섬문화의 정체성이 살아있으면서도 도시 방문객들과 섬주민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문화와 편의시설이 완비된 새로운 섬으로 하루빨리 거듭나기를 기대해 본다.






Green서구 제 211호

박한준 인천서구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