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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서구 풍경 35탄! <인천 서구의 염전>




사진으로 보는 서구 풍경 35탄! <인천 서구의 염전>



  우리나라에 근대식 천일제염이 최초로 시작된 때는 일제 통감부 시절인 1907년이다. 당시 인천(제물포항 일대)의 동부 지역인 주안의 간사지 1정보(町步)에 천일염 시험 염전을 축한 것이 그 시초다.


  “이 주안염전은 1918년까지 212정보로 확장되었고, 21년에 남동염전 300정보, 25년에 군자염전 575정보가 증설되어 32년에는 총면적이 1,115정보에 달했고 전국 생산량의 절반인 15만 톤을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인천은 명실공히 제염업계의 왕자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의사이자 인천의 향토사학자였던 고 신태범(愼兌範) 박사의 저서『 먹는 재미 사는 재미』에 나오는 구절이다. 서구 지역은 천일염 제조 기술이 도입되기 전, 이미 옛날부터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드는 자염장(煮鹽場)이 많이 있었다‘. 1907년 일제가 조사한 인천지역 자염 생산 현황을 보면 인천 서구 지역이 인천 전체 염전 면적의 28%를 차지하고 있고, 생산량도 43%에 달하고 있다고 서구사(西區史)는 기록하고 있다.’


  “인천의 근해 연안과 도서지방은 예부터 소금 생산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서곶 지방에만 염세(鹽稅)를 바친 소금업자가 백 명에 가까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 역시 신 박사의 저서『 개항 후의 인천 풍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염세를 바친 소금업자가 무려 백 명에 달했다는 언급이 놀랍다.‘ 염세를 바친 사람’은 소금 제조장의 ‘대표자’일 것이고 그의 밑에 최소한 한두 사람이 일을 거들고 있었다 치더라도 2, 3백 명은 족히 소금 제조업에 종사했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까 이 일대는 옛날부터 소금업자, 인부가 득실거렸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고, 이로써 서구사에 적힌 풍성했던 자염업의 기록을 충분히 뒷받침한다고 할 것이다.


  서구에 본격적인 천일염전이 축조된 것은 1945년 이후일 것이다. 광복 후 소금 부족으로 관영 염전 외에 민영 염전을 허가하고, 1952년에는 소금 증산 5개년 계획에 따라 정부가 염전 축조를 권장하면서 서곶지역에도 천일염전이 축조되었을 것이다.





  사진은 1960년대 초 오류동 대촌마을 앞에 있던 대흥염전 풍경을 보여준다. 길을 따라 늘어선 삼각형의 움집 형상이 소금을 보관하던 소금창고다. 지금은 사라진 토끼섬과 그 뒤 멀리 반월촌이 희미하게 보인다. 이 사진은 서구문화원에서 발간한 『인천 서구 그리고 사람들』이란 사진집에서 얻은 것이다. 이성수 씨가 제공했다.


  인천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염전이 모조리 사라지고 소금 생산이 완전히 중단된 것은 1970년대 말 무렵부터이다.



Green서구 제212호

김윤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