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 서구 향토역사순례 30탄 <심곡동 은행나무>
심곡동은 예전에는 기피울(깊이울)이란 이름으로 불려져 왔었다. 지명에 나타나듯이 깊은 골짜기에 자리한 마을이란 의미다. 심곡동은 기피울과 양가말이 주축이 되고 임촌말ㆍ모퉁말ㆍ절골말ㆍ뒷말(뒷골)이 모여 동을 이루어 왔다.
또한 징맹이고개 골짜기에 있던 마을은 산골, 그 옆에는 불당이 있어 불당골, 호랑이가 출몰했었다는 범골등의 소지명들이 전해져 이제는 잊혀진 이곳의 이야기들을 오늘날까지 전해주고 있다.
특히 양가촌은 심곡동 초입에 탁옥봉(琢玉峯)을 뒤에 두고 형성된 마을이다. 탁옥봉의 지명유래는 신라의 도인이 수도를 하던 곳으로 옥(玉)을 다듬는다는 마음으로 수도하던 곳이었다고 전하며, 봄이면 진달래가 피고 산림이 우거져 풍치가 아름답고 청아 수려하여 사람들이 많이 찾아드는 곳으로 한때 사슴을 키우던 불로목장도 있었다. 마을의 시작은 고려 말 남원양씨들이 세거를 시작해 곽씨들이 함께 거주하며 양가촌이라 불렸고, 조선 초기에는 2대 왕 정종(定宗)의 14남 정석군(貞石君)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었으며, 조선 중기에는 풍천임씨들이 입향하여 거주를 시작했다.
또한 탁옥봉 기슭에는 조선 문종의 후궁이었던 숙의문씨(淑儀文氏)묘역이 있었는데 1947년 당시 서구 시천동 출신의 심남(心南) 류희진(柳熙晉)이 묘비와 묘지명을 발굴하였다. 현재 묘비와 문인석 등 석물은 전주이씨 묘역으로 이전하여(1974) 봉분을 새로 만들었고 묘지명은 인천시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숙의문씨의 묘가 있던 마을인 절골에는 수백 년간 마을의 변화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은행나무가 있었다. 이 나무는 지금은 개발에 밀려 이전되었지만 기록을 살펴보면 일제강점기에는 '경기도 지정목(指定)으로 수령이 700년이 되었다.'고, 1993년에 간행된 <서구의 향토문화>에는 '천년 묵은 은행나무'로, 2004년에 편찬된 <서구사>에는 높이 13m, 수령 400년'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나무 앞에 서있는 안내판에는 높이는 19.5m, 수령 500년, 둘레가 2.95m라고 표기되어 있고, 3차에 걸쳐 낙뢰를 맞아 본체는 훼손되고 그 일부가 잔존해 오다가 관리 소홀로 고사 직전에 있던 것을 1987년 공무원 교육원을 신축하면서 현 위치로 이식하고 전문적 치료로 소생시켰다는 내용도 함께 소개되어 있다.
이 은행나무는 수백 년이나 되는 수령을 인정받아서인지 나무에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백여 년 전에는 은행나무 한쪽이 썩어가고 수차례 벼락을 맞았다고도 하고, 해방 이후 마을 사람들이 벼락 맞은 은행나무를 보관하면 집안에 내란이 없고 평안해진다는 속설이 퍼져 나뭇가지를 마구 훼손하여 한쪽이 없어졌다고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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