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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 feat. 블로그기자단

인천 서구, 류사눌의 묘역을 찾아보다

인천 서구, 류사눌의 묘역을 찾아보다

 

 

 

 


경서동을 가끔 오가노라면
문화재 도로표시인 갈색으로 된 류사눌 묘 라는안내판을 보게 되었다.
류사눌이란 분이 도데체 어떤 분이시길래
과거에는 아주 벽촌이었을 이곳에 묘를 썼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다.


서구 블러그 기자로 위촉받은 기념으로
서구의 상징인물인 류사눌 묘를 찾기로 했다.
국제c.c골프장방면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안내표시는 나타나지 않았고
내가 아는 길이라 찾아갔다.
입구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안내표시판이 서있다.
애매하다.
그러나 나는 아는 길

 

 

 

외길 언덕길을 지나니
멋을 내느라 그랬을까 너무 작은 글씨 안내판이 보인다.
알지 못하는 사람이 온다면 이 길을 찾아갈 수 있을까?
1km가량을 산길,농로를 가야했다.
역시 멋을 내느라 만들어 놓은 깨알 안내판 왜 이리 작게 만들었을까?

 

 

 


거의 다 왔는데 경운기가 앞길을 가로막았다.
주인은 나타날 기미가 없고 그냥 차를 세워놓고 내렸다.
봄을 맞아 감자를 심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만났는데  전업 농부는 아니고
회사동료들로 구성된 팀인가 보다. 감자를 심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아주 아담스레 만들어진 묘역의 모습이다.
나름 정성들여 묘역을 관리하고 있는듯 싶다.
자랑스런 조상을 생각하면서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을끼?
아니면 문화재로 등록되었으니 지자체에서 관리하고 있을까?
그러나 땅속에서 살아가는 두더지만은 관리할 수 없었나 보다.
군데 군데 흙무더기가 쌓여 있는 걸 보니


안내글을 읽어보니
조선시대 한서부윤도 지내신 분이니 대단한 벼슬을 하신 분이시다.
문화( 황해도 신천) 류씨로서는 대단히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조상이시었으니
그 후손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박연과 더불어 아악정리도 하셨다니 음악계에서도 인정하시는 분이겠다.

 

 

 

 

 

 

 


봉분과 묘비 상석,문인석,장명등을 돌아보지만
전문지식이 없으니 사진만 담아볼 뿐

 

 

 


무덤주변을 둘러보니 냉이가 보인다.

캐다가 한끼 남편에게 된장국을 끓여주면 좋아하겠다 싶어
한주먹을 캐었다. 싱그런 냉이 냄새가 물씬 난다.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이로움은 언제나 감사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논에 수십마리의 기러기떼들이 앉아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얼른 비탈을 내려 가니 그 새 기러기들이 눈치를 채고 훨훨 날아간다.
경서동 태평아파트 상공을 지나  어디로 가는걸까?
서구에서만 볼 수 있는 정겨운 풍경


자녀를 키우는 가정에서 위락시설만 잇는 곳만 다니지 말고
이런 곳도 탐방한다면 자연과 더불어 즐거운 나들이가 될 듯 싶다.

 

류사눌柳思訥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이행(而行). 식(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안택(安澤)이고, 아버지는 임(臨)이며, 어머니는 권숙(權肅)의 딸이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숙부인 관(寬) 밑에서 학문에 힘써 문장에 능하고 경전에 밝았으며,
그릇이 크고 결단력이 있었다.

1393년(태조 2) 식년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합격해 좌정언, 이조·병조의 정랑을 지냈다.
1407년 문과 중시에 병과로 급제해 장령이 되었다.
이어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1409년 집의로서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의 불충(不忠)한 죄와 평양군 조대림(趙大臨)의 석병사(釋兵事 : 병권을 내어놓으라는 뜻)를 탄핵하다가 안악에 유배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1411년에 좌사간을 지내고, 이어 좌부대언이 되었다.

1416년에 지신사(知申事)로서 소합유(蘇合油)를 진상하는 데 잘못을 저질러 다시 안악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왔다.
이듬해 홍주목사·경상도도관찰사·함길도도순문사로서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가 되었다.
그 뒤 1422년(세종 4) 강원도관찰사로 전임되고, 이듬해 경기도도관찰사로서 중군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를 역임하였다.
1428년 한성부윤이 되고, 이어 예문관대제학이 되어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30년 악학제조(樂學提調)로서 신주조회악기(新鑄朝會樂器) 및 가자(架子)를 올렸고,
박연(朴堧)과 함께 「아악보(雅樂譜)」를 완성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어 좌군총제가 되어 이듬해 「용흥가(龍興歌)」를 지어올리고, 1432년에 동지중추원사가 되었다.
1434년 인수부윤(仁壽府尹)으로서 「진작가사(嗔雀歌辭)」를 지어 올리고,
1435년 예문관대제학으로서 구악(舊樂)을 정리하였다. 맹사성(孟思誠)·박연 등과 함께 조선 초기의 악학 정비에 공로가 컸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교통편

 

시내버스

1,7,17-1,77번 (경서동 마을 입구 또는 서인천고교에서 하차, 마을버스 1번 승차)

42-1번 (서부공단에서 하차, 도보로 20분거리)

591번 (경서현장 민원실에서 하차, 도보로 30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