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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서구 향토역사순례 18탄, 숙의문씨 묘역을 찾아서


인천 서구 향토역사순례 18탄, 숙의문씨 묘역을 찾아서


숙의(淑儀)는 조선시대 임금의 후궁에게 내리던 종이품(從二品) 내명부(內命婦) 내관(內官)의 품계(品階)로 소용(昭容)의 위이고 소의(昭儀)의 아래 직위로서 주로 비(妃)의 보좌와 부례(婦禮)를 맡았다. 내명부는 궁중에서 봉직(奉職)하는 품계 있는 여관(女官)들을 말하는데, 정일품 빈(嬪)에서 종사품 숙원(淑媛)까지를 내관, 정오품 상궁(尙宮)부터 종구품 주변궁(奏變宮)까지를 궁관(宮官)이라 하였다.


숙의문씨(世宗8:1426~中宗3:1508)의 묘역은 서구 심곡동 산 36번지 심곡초등학교 뒤편에, 오래전 이곳에서 학문과 도를 닦았다던 도인의 전설이 담겨있는 탁옥봉(琢玉峯) 기슭 양지바른 언덕에, 500여년 성상(星霜)에도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1947년 유학자 심남 유희진 씨가 탁옥봉(琢玉峯) 남쪽 기슭에서 봉분이 상한 묘와 땅에 묻혀 있던 묘비를 찾아내었고, 1997년 연희지구 개발로 탁옥봉이 사라지자 동쪽의 산 중턱으로 이장하였다)





이곳 묘역은 전주이씨의 묘역으로 조선 2대 임금 정종(正宗)의 14남 정석군(貞石君)의 5세손 이비(李備:成宗25 :1494~明宗16:1561)가 세종 연간에 부평부 모월곶면 심곡리에 처음으로 입향하여 세거한 후 고인이 되어 묻힌 곳이며, 이후 전주이씨의 선영이 된 자리이다.


이비(李備)의 묘역에는 고비와 문인상 한 쌍이 자리해 있는데 사후 종친관계 품계인 창선대부(彰善大夫, 정3품) 강동부령(江東副令, 종5품)에 봉해지고 부인에게는 신부인 문화류씨로 종친의 봉작이 내려졌다.


숙의문씨 묘역이 이곳에 자리하게 된 계기는 후사가 없어 강동부령 이비의 '장숙모'가 되는 연유로 모셔졌다고 문중에서는 증언한다. 숙의문씨의 본관은 남평문씨(南平文氏)로 첨지(僉知)를 지낸 문민(文敏)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세종조에 판중추부원사를 지낸 문효종(文孝宗)이며 증조부는 고려 공민왕때 순평군(順平君)으로 봉해진 문달한(文達漢)이 가계를 이루고 있다.


숙의문씨는 세종 24년(1442)에 17세의 나이로 문종(文宗)의 후궁(后宮)으로 선임 되었는데 문종이 세상을 떠나자 세조(世祖) 초에 소용(昭容)으로 승차하였고 명종(明宗)때 다시 숙의(淑儀)로 승차하여 83세(中宗3:1508)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숙의문씨가 평생 마음이 어질고 무던했으며 공손하고 검소한 생활로 장수를 하셨음은 하늘의 도움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이해 9월 26일에 부평의 가원(佳原)을 택하여 모셨다고 '묘지명'에 기록한다.





숙의 문씨의 묘지명(墓地銘;죽은 사람의 인적사항과 행적,묘의 위치와 좌향 등을 적어 묘에 묻은 판석 또는 도판)은 통사랑 권지 승문원 부정자 반석평(潘碩枰)이 썼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묘지명은 1947년, 봉분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어 현재 인천시립박물관에 백자 두 편이 보관되어 있다. 또한 묘갈에는 '문종후궁숙의문씨지묘'(文宗后宮淑儀文氏之墓)라 적혀있고 상석과 그리고 좌우에 문인석 2기가 세워져있다.


묘역이 있는 심곡동은 지명 그대로 깊은 심(深), 골짜기 곡(谷)으로 '기피울'이라고 불리어진 곳이기도 하며 과거에는 양가말, 모퉁말, 절골말, 뒷말 등의 지명으로 마을을 이루었다. 심곡동은 그 역사 만큼이나 오래된 500여년 된 은행나무(인재개발원 내)와 엄나무∙물푸레나무(모퉁이 공원 내) 등이 현존하고 있기도 하다.


60~70년대에는 딸기밭과 사슴농장이 있어 시내에서도 많이 소풍을 오기도 했던 지역이었지만 지금은 서구의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옛모습을 찾기 어렵고 그나마 전주이씨 묘역과 보호수만이 예전의 심곡동을 지키고 있는 듯하다.


박한준(인천서구문화원장)

자료 : Green 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