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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서구 풍경 9탄, 가정터 표지석



사진으로 보는 서구 풍경 9탄, 가정터 표지석


조선 창업의 개국공신 숙위공(肅魏公) 조반(1341~1401)의 별장 '가정(佳亭)'이 있었던 터를 표시하는 표지석이다. 가정동 456번지에 있다. 가정터[佳亭址]는 옛날에는 좀 높은 동산 위에 있었으나 도시 개발로 인해 일대가 평지가 되었다. '부평부읍지' 고적(古蹟)조에 "가정은 석곶면에 있는데 개국공신 부흥군(復興君) 조반의 별업(別業)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별업은 별장이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그 아들 서강(瑞康)이 이조참판으로 만년에 이곳으로 물러나 머물며 스스로 호를 경은이라고 하며, 여러 번 조정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으나 출사하는 것을 꺼려 나가지 않았다. 세종 때 화공을 보내 그의 처소를 그리게 하였더니 당대의 명사들이 나아가 시를 지어 읊은 것이 많았다. 안평대군(安平大君) 용(瑢)은 기러기로 시문을 지어 그림 한 첩을 만들었으니 이름 하여 석호가정별업도(石湖佳亭別業圖)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정터' 표지석 뒷면에는 이곳에서 만년을 보낸 조서강이 읊은 자음시가 새겨져 있다.


이처럼 가정리는 조반의 별장 '가정'에서 유래한 것이다. 가정리는 일제 강점기인 1914년, 지방행정구역 통폐합 때 옛 부평군 석곶면에 편입된다. 그 후 1940년 제2차 부역 확장때 비로소 인천부에 편입되면서 일제의 군함명을 따 천대전정(千代田町)으로 명명되고, 광복 후에야 본래대로 가정동 명칭을 회복한다.


1968년 구제(區制) 실시와 함께 북구에 속하면서 가정·신현·석남동으로 불리다가 1977년에 석남동으로, 그 후 1983년 인천직할시 승격과 동시에 다시 석남동과 가신동(佳新洞)으로, 1990년 1월 1일 가신동을 다시 가정동과 신현동으로 분동한다. 이어 1991년 8월 17일 가정동이 다시 가정1동과 2동으로 분동되며, 1995년 인천광역시로 개편되면서 서구 가정1, 2, 3동으로 오늘에 이른다.



(사진 : 가정터 표지석)



이 사진은 1982년경에 촬영된 것으로 그 이전에 가정 터를 알리기 위해 세운 듯한데 기단의 벽돌 쌓은 것이 그대로 드러나 보일 정도로 거칠고 조악하다. 후일 다시 오늘의 모습으로 주변정비가 되기는 했지만, 누가 글씨를 썼고 언제, 어떻게 세우게 되었는지 상세하지가 않다.


김윤식/시인

자료 : Green 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