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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 서구 향토역사순례 9탄, 심즙 신도비를 찾아서



인천시 서구 향토역사순례 9탄, 심즙 신도비를 찾아서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된 '심즙 신도비'는 서구 공촌동 산8번지에 자리해 있다. 서구에서 부평으로 넘어가는 경명로길 좌측 서부교육지원청을 조금 지나 공촌천 상류지점 좌측으로 200여m 지점의 산기슭이다. 이 산의 지명은 갈뫼 혹은 갈산으로, "인천지명유래집"에 의하면 칡이 많아 갈산이라 불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진 : 심즙신도비)



이 산 옆을 오르면 공촌동에서 검암동 발아장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작은 징맹이고개가 있고 서쪽편의 고개로는 공촌마을에서 장기동에 있는 황어장까지 넘을 수 있는 장고개 또는 숫돌고개라 불려지던 지명이 남아 있지만 현재는 등산로로 이용되고 있다. 신도비가 있는 갈산의 남쪽에는 "고련이","고현리","이십만평"이라는 지명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200여 호의 집이 있었다고 전한다.


공촌동은 본 마을과 갈뫼 마을, 과기평 마을 등 세 개의 자연 취락으로 이뤄졌다. 공촌동에서 계양으로 넘어가던 고개를 경명현이라 하는데 이곳은 해안방어를 위해 설치되었던 '연희진'의 포대가 폐지되며 이를 대체할 목적의 중심성이 있었고 고려 말 충렬왕 때 국영매방이 설치되어 충렬왕이 다섯 차례에 걸쳐 사냥을 즐겼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삼남지방에서 한양으로 가던 길목이어서 교통과 해안방어를 위한 중요한 위치에 있던 곳이기도 하였으며 "부평부읍지"의 기록에 의하면 경명현에는 신라고찰 만일사와 사직단이 조선시대까지 있었던 유서 깊은 지역이지만 현재 이러한 기록을 기억하는 이들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갈산에는 '심즙 신도비'외에 정헌대부 이조판서 행통정대부 여주목사를 지낸 여주공 '심우정 신도비'와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오탄공 '심유 신도비'도 나란히 위치해있고 심즙의 아들인 청봉 심동구의 묘갈도 좌로 세 번째에 세워져 있다.



(사진 : 심즙묘비)



한 지역에 신도비가 3기가 있어 그 가치와 의미를 더하고 그와 관련한 기록들은 지역의 향토사료로도 매우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신도비는 임금이나 고관의 무덤 앞이나 또는 연고지의 길목에 세워져 고인의 사적을 기리는 비석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무덤의 동남쪽에 위치한다. 신도라는 말은 망인의 묘로, 즉 신령의 길이라는 뜻으로 고려시대에는 삼품 이상의 관직자 묘역 앞에 세운 것으로 현존하는 것은 없고 조선시대에 와서는 이품 이상의 관리들에게 세우는 것을 제도화 하였다. 또한 공신(功臣)이나 석학(碩學) 등에 대하여도 왕명으로 신도비를 세우게 하였다.


이곳의 신도비에는 당대 의정부 좌의정을 지낸 오성부원군 이항복을 비롯해 대광보국숭록대부영중추부사를 지낸 우암 송시열, 영의정 이의현 등이 글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밖에도 묘역의 봉분 앞 묘비 역시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어 당대의 장묘문화를 알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이곳에는 상석과 문신상이 좌우에 배치되어 있고 망주석도 여러 기 세워져 있다.


심즙 신도비의 내용을 간략히 서술해 보면 심즙(선조2:1569~인조22:1644)의 본관은 청송 심씨이며 자는 자순이고 호는 남애이며 정헌대부 이조판서 행통정대부 여주목사를 지낸 여주공 심우정의 아들이다. 공은 선조 29년(1596)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에서 벼슬을 시작해 한림원 대교, 수원부판관에 오르고 예조정량 겸 문학시강이 되어 세자를 모시고 강론을 했다. 그 후 여러 관직에서 불의에 굴하지 않고 올곧게 관료의 부정을 바로 잡는데 헌신하다 파직과 좌천, 복직을 반복했고 호남조도사의 직을 잘 수행하여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우기도 했다.


광해 9년(1617)에 이르러 검상, 사인으로 임명되어 필선을 겸했다가 보덕으로 승진하여 중서장이 되고 광해 10년(1618)에 이르러 벼슬을 버리고 은거를 하기도 했다. 그후 인조 원년에 선혜청과 재성국의 관리자로 임명되고 왕명으로 두 차례나 관서의 접반사가 되어 명나라 장수들을 잘 처리하고 승지가 되었고 인조 2년(1624)에는 어가가 공주로 가는데 호종을 잘 마무리 지어 가선계에 올라 여주목사, 판결사를 거쳐 도승지, 예조, 형조참판, 형조, 공조판서를 지냈다. 병자호란(인조14:1636) 때에는 탄핵으로 파직되었다가 복직되어 호종공신에 추가되어 정헌계에 승진되어 기로사에 들게 된다. 인조18년(1640)에 이르러 지중추부사에서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심즙에 대한 문헌기록은 선조실록, 광해군일기, 인조실록, 국조인물고, 시고, 호고 등에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고장 선조들의 훌륭한 공적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기에 관심 있는 지역 주민들은 유서 깊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공촌동 '청송심씨 묘역'을 찾아 선인들의 뜻을 기리고 향토의 역사와 문화를 되새겨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박한준(인천서구문화원장)

자료 : Green 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