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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 서구 향토역사순례 8탄, 중심성지를 찾아서


인천시 서구 향토역사순례 8탄, 중심성지를 찾아서


중심성(衆心城)은 서구와 계양구 경계를 이루는 경명현(서구 공촌동 산1번지 일원)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의 능선을 따라 축조한 일자(一字)형태의 산성이었다. 인천 앞바다에서의 병인∙신미양요(1866)와 운양호사건(고종12년:1875)으로 제물포 개항을 앞둔 당시, 고종16년(1979)에 서해방어를 위한 화도진과 연희진이 설치되었다. 이는 조선의 문호 개방과 함께 국방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특히 서해의 방비는 인천항과 강화수로의 중요성을 심각하게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제물포가 개항하게 되는 임오군란 직후(1882)에 화도진과 연희진은 폐쇄되고 후속 방비책으로 고종20년(1883)에 당시 서곶에서 계산동으로 넘어가는 경명현(징맹이고개, 징매고개, 천명고개, 수주고개)에 해안 방어와 강화수로 방어를 위한 중심성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사진 : 현재 서구청사 내에 있는 공해루 초석)



이곳은 삼국시대부터 교통의 요지로 중국대륙으로 연결되는 통로로 인식된 중요한 지역이며 그 방비를 위한 계양산성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해안에서 중심성까지는 약 2㎞이며 중심성에서 서울까지는 약 28㎞에 불과하므로 중심성의 역할은 매우 중요시되었다. 중심성 뿐만 아니라 계양산(군자봉, 옥녀봉, 꽃뫼봉)에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전하는, 현재 많은 부분이 복원된 계양산성도 동쪽 기슭의 봉우리에 남아 있는데 계양산 줄기에 있는 중심성은 계양산성과 더불어 서해의 관문으로 군사, 교통의 요충지였다고 할 수 있다.


계양산(수주악, 안남산, 아남산, 노적봉, 환여금, 용장지산, 경명산)의 높이는 395m로 인천지역에서 가장 높은 진산으로 불려왔고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어 해안을 방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아울러 그 역사성만큼이나 이곳에 얽힌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지는데,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이나 홍건적의 난, 왜구의 침입 때 강화와 개경 방어의 거점 역할을 했고 고려 충렬왕은 개경에서 이곳 국영매방인 응방지(계양산 서쪽 기슭 고갯마루)로 사냥을 즐기러 여러 차례 방문하였고 제국공주와 방문하여 사냥을 즐기고 흡족해 하여 부평이 길주로 승급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 부평향교가 화재로 소실될 때 세 명의 교생 중 서구 원창동(한자곶이) 출신의 박대충이란 선비가 선현들의 위패를 계양산 장사굴에 보관해 피해를 막았고, 병자호란 때에는 서구 검암동(간재울) 출신인 송윤이란 선비가 선현들의 위패를 공자지벌(공촌동)에 숨겼다가 후에 부평향교 복원에 기여했다는 기록도 있다.



(사진 : 중심성지 공해루 초석 / 출처: <서구향토지>, 2006년)



또한 경명현에는 징맹이고개가 있는데 고려 때에는 삼남지방에서 개경으로 통하는 길목이었고 조선시대 충청과 호남에서 배를 타고 올라와 서울로 가는 길목이어서 중요한 교통요지였지만 도둑들이 창궐하여 백여 명이 고개를 넘어야 했기에 '백명고개'라는 이름으로 불린 전설도 있다. 이렇게 중요한 위치의 계양산에 설치되었던 중심성은 고종20년(1883) 10월 조정의 명으로 부평부사 박희방과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금 60냥을 마련하고 힘을 합쳐 착공한 지 1개월여 만에 성을 축조하였다. 성의 이름도 주민이 힘을 합쳐 축성했다 하여 중심성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하며, 성문은 지역의 이름을 따서 경명문이라 하고 문루에 누각을 세워 공해루라 명명하고 이곳에 박희방이 부평8경의 시를 지어 걸었다고 하는데 서구에 해당하는 시제로는 원적모우, 경명낙조, 난포귀범이다. 또한 이곳 중심성에서 서쪽으로 20여m에 위치해 있던 중심성사적비에는 중심성을 세우게 된 내용과 참여했던 인물들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중심성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성과 문루가 헐려 없어지고 사적비는 인천시립박물관에 옮겨져 보존되다가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9월에 함포사격으로 박물관이 화재로 소실되면서 훼손되고 말았지만 다행히 비문 내용만은 필사본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역이 갖고 있는 문화와 역사는 삶의 지혜이며 자산인 것이다. 따라서 근래 들어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명제가 새삼 부각되고 있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중심성지는 비지정 문화재자료로 분류되어 있지만 한때 개항으로 급변하는 지역의 정세와 맞물려 외세를 방비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의미 있는 유적이었기에 그 가치와 의미가 중요하다 생각되어 청소년들을 비롯한 현대를 사는 지역주민에게 중심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알리고자 자료들을 정리해보았다.


박한준(인천서구문화원장)

자료 : Green 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