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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 서구 향토역사순례 2탄, 허암지(虛庵址)를 찾아서


인천시 서구 향토역사순례 2탄, 허암지(虛庵址)를 찾아서


부평부읍지 고적조에 "허암구지(虛庵舊址)는 허암산 밑에 있는데 한림학사(翰林學士) 정희량(鄭希良)이 복거(卜居)하면서 호를 허암이라 하였으나 뒤에 자취를 감추어 끝마친 곳을 알지못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허암지는 인천기념물 제58호로 지정되어 검암동 산61-5번지에 남아있다.


계양산 서쪽에 위치한 허암산(虛庵山)의 북쪽 기슭 중턱에 500여 년 전 한 선비가 은거하며 암자형적(庵子形蹟)을 남겼다.


시를 짓고 다도(茶道)와 혼돈주(混沌酒)로 시대의 배경이 암울함을 탄식하고 비통함과 안타까운 억울함에 자유를 희구했고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다. 그분이 바로 허암(虛庵) 정희량(鄭希良,1469~?)이다.


공(公)은 성종(成宗) 즉위년인 1469년 한양에서 철원부사 연경(延慶)의 아들로 태어나 성종22년(1491년)에 국자감시에 장원(壯元)을 하고 다음해 진사시에서도 장원을 하여 문장을 세상에 알리고 한림(翰林)에 오른다. 같은 해 증광시에 급제하여 승정원 권지(權智)에 보직되고 부정자(副正字)에 임명되었다. 4년 후 예문관 검열(檢閱)을 거쳐 2년 후 연산군 3년(1497)에 예문관 대교(待敎)로 승진되었다. 이 때에 "치정(治政)10조"를 상소하였다. 같은해 여름에는 사가독서(賜暇讀書)호당(湖當)에 선발되어 학문에 정진하여 당시 문장 4걸(박은, 이행, 홍언충, 정희량)로서 성종실록, 연산군일기 실록편찬에 기여했다.


평소 의기에 넘치는 선비정신으로 조정에서의 큰 역할을 담당하던 그였지만 연산군의 폭정으로 그 직을 물러나려 했지만 허락되지 않고 예문관 봉교(奉敎)로 승진되었다. 그러나 제자의 조의제문으로 인해 무오사화(1497)때 의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의주에서 김해로 이배되고 유배생활 4년 만에 고양(高陽)의 모친 묘에서 시묘한 뒤단오날에 자취를 감추었다.





공은 음양학(陰陽學)에도 조예가 깊어 갑자사화(1504년)를 예견했다고 한다. 공이 은거했던 검암동의 허암지에는 500여년이 지난 현재에도 샘이 솟고 작은 고랑으로 끊임없이 물이 흐르고 초옥(草屋)이 있었을 자리에 홀로 뒹굴던 주춧돌의 이끼 낀 흔적만이 그때를 암시하는 것 같다.


이곳에서 홀로 차(茶)를 달여 매계(梅溪)조위(曺偉,1454~1503)에게 올리며 시를 지었다고 하는데 후손들에 의해 야좌전차(夜座煎茶:밤에앉아차를달이다)라는 제목의 시비(詩碑)를 세워 한층 공의 뜻을 높여 놓았다.


허암의 사상과 철학·시문과 음양학 그리고 다도, 주도 속에 담겨있는 도(道)와 선(仙),단(丹) 등 정신수련 및 수양의 사상에 깊은 관심과 연구가 지속되리라 사료된다.


이러한 허암의 뜻을 기리는 '허암백일장'을 올해도 이어갈 것이며 앞으로도 지속되어 역사와 현재를 함께 읽을 수 있는 유적지로써 지역의 향토역사와 문화가 바로 정립되는 시발점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향토역사와 문화의 초석을 다지는 향토문화전승이 이곳 허암지로부터 시작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인천서구문화원장 박한준

(자료 : Green 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