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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 서구 향토역사순례 7탄, 연희진지를 찾아서

인천시 서구 향토역사순례 7탄, 연희진지를 찾아서


인천 서구 연희동에 위치한 계명공원(연희로 42번길:연희동 247번지) 내에는 '연희진지:連喜鎭址/연희진터'라고 하는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은 현재 인근에 서곶초등학교와 서곶중학교가 설립되고 주거지역으로 개발되면서 옛모습은 찾아볼 수 없지만 한때 수도의 관문이며 해운 요충지인 인천 연안이 개항될 것에 대비하여 동구 화수동의 화도진과 함께 설치된 방어진이었으며 동시에 인천시 서곶출장소가 위치했던 곳이기도 한 역사적인 현장이다.





연희진이 설치 된 시대적 배경은 개항에 따른 부평연안의 연안방비 강화가 목적이 있었다. 역사학적으로 연안의 방비는 그 중요성이 매우 높았고 선사시대부터 오랫동안 이 지역에서 인간의 활동무대가 이루어졌으며 근세에 접어들어서도 군사적∙경제적 이유에서 요충지로서 주목 받게 된 데에는 그러한 역사성이 반영되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서구 일대는 서해와 한강 유역이 인접한 유리한 여건 때문에 선사시대 이래 많은 당시 거주민들의 생활터전이 되어 왔고 최근 들어 신도시개발 등의 건설사업으로 관련 유적지와 유물들이 발굴되고 학술자료가 체계화 되면서 이 일대가 군사적∙지정학적∙경제적으로 중요했던 지역이었음이 여러 방면에서 나타나고 있다.


조선시대에 역사적으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던 부평도호부는 개항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는 연안방비의 강화와 관련하여 많은 시설이 설치되었다. 고종 12년(1875) 8월 21일, 일본의 함정 운양호가 강화도 동남방 난지도(현 서구 경서동) 부근에 닻을 내리고 강화 초지 일대를 포격하는 일이 발생하고 다음 해 고종 13년(1876) 강화도 조약에 따라 조선의 개항이 결정된 이후 제물포가 개항후보지로 부각되면서 조정에서는 인천과 부평연안의 방비가 논의되고 고종 15년(1878) 8월 27일, 부평연안의 방비강화에 대한 논의와 함께 포대설치를 결정하여 고종 16년(1879) 7월에 어영대장 신정희와 강화유수 이경하(李景夏)와 함께 화도진 과 연희진

을 설치하게 된다.



(사진 : 연희진지)



연희진에 대한 문헌기록은 1941년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서곶방면의 인물지리와 문화유적조사를 실시한 후 보고된 '서곶지방지'에 수록되었고, 1959년 인천시립박물관장인 검여 유희강(劍如 柳熙綱: 1911~1979)에 의해 편찬된 "향토인천 의 안내고적∙명승∙천연기념물" 등에 수록되어 있고, 1973년 인천시사(仁川市史)에 연희진과 연희포대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1997년 발간된 "서구향토지"에 따르면 연희진 관할의 포대는 연희포대 3좌(용두산 인근 용두포대), 갯말(浦里∙원창동) 2좌, 가정포대(봉우제) 1좌, 가좌동 1좌 등이 각각 있었다고 전한다. 그 후 연희진은 임오군란(壬午軍亂) 직후 고종 19년(1882) 6월 28일, 3년도 못되어 혁파되었고 고종 20년(1883) 10월에 부평부사 박희방

(朴熙房)이 조정의 명으로 주민들과 함께 경명현(景明峴∙징맹이고개)에 중심성(衆心城)을 축조하여 연희진의 방어를 대신하게 되면서 우리 고장의 중요 방어시설이었던 연희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지역환경은 변하지만 향토의 역사와 문화는 지속적으로 정리, 보완되어 온전히 후대에 전승되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다시 한 번 관련 자료들을 들춰내어 되새겨 본다.


박한준(인천서구문화원장)

자료 : Green 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