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인천광역시 서구 풍경 54탄! <연희교회와 김윤화 김기선 부자>
서구문화원에서 발행하는『 문화서구』에도 게재된 바 있지만, 이번 호에는 연희동 출신 김기선(金基善 1884~1963)과 연희감리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본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고 신태범(愼兌範) 박사의『 인천 한 세기』에 소상히 나와 있다.
“율목동 211번지의 기와집이 ‘미국집’ 김기선 씨 댁이었다. 그는 1885년에 서천 연희리에서 누대를 지낸 토반 상산김씨 윤화(閏花)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인천해관의 직함을 갖게 되어 인천으로 이사와 내리교회 교인이 되었다.”
김윤화가 교인이 된 것은 그가 인천해관에 근무하면서 서양인들과 접촉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전도를 받은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 아버지를 따라 기선도 자연스럽게 내리교회 교인이 되었을 것이다. ‘미국집’은 김기선이 영어를 잘 하고 미국에서 살다 왔기 때문에 동네에서 붙인 별칭이다. 다음도 역시 신 박사의 글이다.
“김윤화는 1902년 내리교회 조원시 목사가 주선한 하와이이민회사를 이용하여 개명 교육을 받도록 외아들인 기선과 처남 박제원(박영효의 계씨)을 데리고 하와이로 갔다. 그곳에서 두 젊은이의 미국 본토 입국을 마련한 후 귀국하여 뒷바라지에 전념했다. 기선은 시카고에 정착하여 링컨고등학교를 마친 뒤 프린스턴대학에 진학했다.”
김기선이 미국에 가게 된 사연이다. 당시 내리교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 이민인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 이민을 주선했던 곳으로 하와이 이민 편에 섞여 김기선이 미국 유학길에 나선 것을 알 수 있다. 아무튼 김기선은 19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하딩 후보를 도와 당선시키는 등 큰 역할을 한다. 물론 그 이전에 선배인 서재필 박사와 함께 미국 교민 지원과 1908년 전명운(田明雲), 장인환(張仁煥) 두 의사의 장거를 지원하는 등 많은 애국 활동을 했다.
김기선은 미국에서 도료(塗料) 회사에 투자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귀국해서는 고향인 연희리에 과수원을 개발하는 등 농토를 늘리고 아버지가 창설한 연희예배소를 예배당으로 증축했다. 김포와 인천 근교에도 많은 농토를 마련했고 육영사업을 위해 부평 일대 광활한 토지를 사들였다. 이 땅은 1940년대 일제가 부평 일대에 군수공장을 지으면서 강제 수용 당했고, 농토 역시 광복 후 토지개혁으로 종이장이 되고 남은 것은 연희동 과수원과 율목동 주택뿐이었다.
『인천서구 그리고 사람들』 사진집 속의 이 기와집 교회는‘ 1950년대 모습으로 1903년 김윤화가 설립을 준비하고 1905년 방족신 부평구역 순회전도사가 설립하였다’고 설명이 되어 있다. 김윤화가 세운 초창기 교회 사진인지 김기선이 증축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늘 하는 말이지만 김윤화, 김기선 부자의 사진 한 장이 남아 있지 않고, 교회 관련 연도 기록조차 분명치 않은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Green서구 233호
김윤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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