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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서구 향토역사순례 15탄, 경은당 조서강 묘역을 찾아서


인천 서구 향토역사순례 15탄, 경은당 조서강 묘역을 찾아서


인천 서구 석남동 독굴, 석동(石洞)에 자리한 경은당 조서강의 묘역은 인천시 기념물 제 6호로 지정(90.11.9) 되어 있다. 독굴은 석남동 옻우물에서 갯말(원창동)로 갈 때 도당재산 능선인 길 밑의 남쪽 산 중턱에 자리해 있다. 묘역의 뒤편에는 왕정산(현 SK에너지)이 있고 동쪽으로 원적산(元積山)이 있으나 아파트로 인해 산이 가려 답답함을 더하고 현재에는 묘역 서쪽과 좌측으로 도로가 생겨 지형이 많이 변하여 그 위치를 찾기도 어렵고 묘역이 갖는 지형이 많이 훼손된 상태이지만 과거 이곳은 남쪽으로(현 한국타이어 자리) 배가 닿던 포구가 있었고 신현동과 가정동 사이(현 신현중)로 큰 갯골이 있어 바닷물이 드나들고 신현동의 회화나무 인근에 배를 정박했었다고 전하니 노을에 물든 바다를 비롯해 율도 등 작은 섬들을 조망할 수 있었던 왕정산 밑의 바닷가 마을의 한적함은 원로들의 추억 속에만 남아있고 이제는 화력발전소 등 공장지대와 아파트 지역으로 변하면서 묘역은 도로를 지나다보면 그 위치를 가늠하기 어려운 곳으로 변했다.





경은당 조서강의 행적을 간략히 기술해 보면 공은 조선 개국공신의 한 분인 숙위공 조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숙위공은 이 지역 가정(佳亭)에 별장을 짓고 노년을 지냈었다고 하고 그 아들인 경은당이 세종조에 귀향해 말년을 보내다 사후에 인근 석남동에 묘역을 쓰게 된 것이다. 공은 태종 14년(1414)에 문과 식년방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당시 경은당과 학역재 정인지는 당대 문장이 뛰어남이 우열을 가리기 어려워 태종이 임의로 고른 장원이 정인지였고 나머지 하나가 바로 조서강의 답안지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그 후로 두 분은 교분이 두터워 학문을 논하고 교류를 이어갔다. 세종조에 조봉대부, 의정부사인, 지제교, 춘추관기주관으로서 태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그 후 사헌부 장령, 집의를 거쳐 집현전의 부제학과 사간원 좌우사간, 중추원 첨지 중추원사와 진무사를 지내고 함길도 진무사를 거쳐 승정원도승지를 역임하

고 세종 25년에 가선대부 품계에 올라 50세의 나이에 이조참판을 끝으로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공은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당대의 존경을 받았으며, 올곧은 성격으로 직언을 서슴치 않았다고 전한다.


경은당이 이조참판을 끝으로 귀향하게 되자 세종 임금은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친히 보내 다시 벼슬길에 나오도록 했으나 응하지 않고 가정에 머물렀다고 한다. 왕명에 의해 안평대군과 학역재 정인지, 이경석, 유의손, 황정혹 등이 '석호가정별업도'에 그림을 그리고 시를 적어 세종 임금에게 바쳤다고 하는데 그 시문에는 이 곳 가정 인근의 아름다움을 기록하고 있다. 장제(長堤) 별장의 아름다움과 남포(南浦)로 가는 배가 닿은 모습, 천마산에서 가정 앞으로 흐르던 구불구불한 시내의 모습과 갈대숲에서 낚시하는 강태공의 모습, 장사배가 머물던 언덕의 저녁 연기, 배를 매어 두었던 포구 모습, 물결 잔잔한 바다 모습, 꽃이 만개한 가정의 들판을 보며 거문고를 타고 시를 짓는 선비의 모습들을 그림과 시로 남겼다고 한다. 또한 세종조 이후 '가정별업도'를 시제로 한 과거 시험도 열려 인근 시천동 출신의 진주류씨 문중 계북

(桂北) 류태동(柳泰東:1792~1864)이란 선비가 가정의 아름다움을 시로 지어 과거에 급제했다고 하는데, 공은 헌종 3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승정원 우부승지, 영흥부사를 지내고 호조참의를 지내기도 하였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서구의 모습이 600여년 전 '가정별업도'에 아름다운 그림과 시문으로 전해진다는 것은 서구의 옛 모습과 향토애를 상기하게 하는 귀중한 사료라고 여기며 고장의 인물에 대해 자긍심과 지역정체성 함양을 위해 서도 뜻 깊은 일이므로 앞으로도 많은 지역의 향토역사자료들이 좀 더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보완, 기록되어 길이 전해지기를 바래본다.


박한준(인천서구문화원장)

자료 : Green 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