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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 서구 향토역사순례 29탄 <검암동 상수리나무 이야기>




인천시 서구 향토역사순례 29탄 <검암동 상수리나무 이야기>




  허암산 줄기 나지막한 곳에 300여 년을 검암동 (바르뫼, 검바위, 간재울) 마을 주민들의 정신적 중심지 역할을 자임하던 오래된 노거수가 자리하고 있다. 현재는 동산이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야트막한 구릉 옆으로 도로가 나고 서쪽 방향은 낭떠러지로 변해, 그 옛날 주민들을 위해 넓은 공터를 제공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초라해져 버렸다.


  과거 이곳은 역사적인 일화를 많이 간직한 오래된 마을이었지만 현재는 상동(바르뫼), 중동(검바위), 하동(간재울) 모두 아파트 단지를 비롯한 주거지로 변했고 새로 도로가 개설되었다. 그리고 백석교와 시천교 밑으로 1천년 전의 숙원이었던 운하가 뚫려 '아라뱃길'이란 이름으로 이곳 검암동을 지나 서해로 이어지고 있다.


  그 옛날 검암동 북쪽 시천(始川) 발원지인 상동 인근까지 서해 바닷물이 들어와 배가 갯골을 따라 드나들었지만 시천동에 둑을 막아 농지를 만들고, 한들방죽ㆍ해머리방죽(海頭防築)을 막아서 검암동과 백석동에는 천일염전이 생겼다.


  허암산 북쪽에는 허암 정희량(虛庵 鄭希良)이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면서 초정을 지었던 허암지가 있다. 그리고 발아장 밑에 살던 '구씨' 부자가 난리 통에 은을 숨겨 놓았다는 우물인 '은지(銀地)'가 있고, 개경으로 통하는 큰 길목에는 '발아장(發阿場)'이 크게 번창하여 '민가가 5백'이나 되었다며 이 지역의 옛 이름이 바름이 마을이라는 기록도 전해진다. 특히 발아장은 중국ㆍ일본에도 잘 알려진 인삼과 사자발쑥이 유명했고 황어장이 생기기 전까지 우시장이 조선 중기까지 성행했다. 또한 삼남지방에서 송도, 서울로 통하는 길목이었으므로 계양산 북쪽 기슭꽃뫼(花山) 밑에는 고려 때 "구슬원(球瑟院)"이 있어 이곳을 지나 가현산 밑의 "광인원(廣因院)"을 거쳐 조강(祖江)나루를 건너 풍덕(豊德)으로 해서 개성(開城)을 왕래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장모루(長牟樓)"라는 여각촌이 있어 비파, 거문고를 켜고 "격구"라는 경기도 해서 이 지역이 활성화되고 번찬했었다고 한다. 또한 인근 징맹이고개(경명헌)에는 고려 충렬왕 때 '응방'을 설치하여 친히 매사냥을 왔었고 지명도 당시 서구가 속한 부평의 지명이 "길주(吉州)"로 명명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러한 역사를 가진 검암동의 상동과 중동 사이 야트막한 동산에 자리해 과거 마을의 영화를 지켜보며 주민들의 정신적인 중심으로 넓은 공간을 내어주었던 상수리나무는 마을의 모든 것들을 묵묵히 품으며 지켜왔다. 이곳의 상수리나무는 참나무과로 1982년에 보호수로 지정되어 구에서 보호ㆍ관리하고 있다. 수령이 300년 이상, 높이가 약 28m, 둘레가 2,8m인 이 나무는 당산목으로 밑에는 상석이 놓여 있다.


  검암동 주민들은 오래전부터 이곳 상수리나무밑에서 매년 10월 초하루에서 중순 이전에 날을 정해 마을의 평안과 한해 농사의 풍요에 감사하고 마을 주민들의 무병을 기원하고 가족의 번영을 위해 제를 올려 왔는데 마을의 지명에도 나타나듯이 천신제를 지내오다가 일제 이후부터 유교식 제례의 산제사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  을 주민들은 이 상수리나무를 신성시 여겨 주위를 항시 깨끗이 유지, 관리했고 동네에 상(喪)이 발생해 상여가 나갈 때에도 나무를 피해 멀리 돌아서 지났다고 한다. 검암동의 산제사는 다른 마을에서와 같이 마을의 평안과 안녕, 재액과 병마 예방뿐 아니라 마을의 한 해 갈등과 부정을 해소하고 공동체의식을 함양했는데 이는 노동력을 요하는 농경사회에서 단결된 애향심 고취에도 기여했다고 본다.


검암동의 노거수 상수리나무는 그 세월만큼이나 역사와 문화를 고이 간직하고 마을 주민들의 휴식처로, 정신적 주목으로 오늘도 예전 그곳에 자리해 있지만 이제는 도시화에 밀려 찾는 이도 드물고 수많은 차량들만이 무심히 스쳐 지나고 있다.





/Green 서구 제205호

서구문화원 박한준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