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쏙쏙 구정생활정보

인천시 서구 향토역사순례 31탄 <왕길동(旺吉洞)의 소나무를 찾아서>



인천시 서구 향토역사순례 31탄 <왕길동(旺吉洞)의 소나무를 찾아서>




  왕길동은 백석산(白石山 : 57m)의 낮은 구릉의 산줄기가 동남쪽으로 뻗어간 당산(堂山)을 뒷산으로 해서 형성된 마을이며 앞으로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고 사월(沙月)부락의 한메산(104.9m)과 광명산(55m)이 자리하며 예전에는 ‘고잔’이라고도 불려져 왔다.


  문헌상“ 왕길”이라는 지명은 정조13년(1789)에 발간된「 호구총수」의 기록에는 옛 검단면 소속의 왕길리(旺吉里)로 표기되었고 당시 왕길리는 소왕길리, 안동포리, 속사곶리를 병합해 이루어졌다. 행정리로는 대왕, 소왕, 안동포, 사월 등으로 구분되었지만 「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 1530」에는 백석산 중턱에 자리했었던 백석산 봉수(오류동 봉화촌, 47m)에 대한 기록이 있고, 현재 이곳의 지명에‘ 봉화촌’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문헌상“ 왕길”이라는 지명으로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그 이전부터라고 볼 수 있다.





  검단사거리에서 서쪽으로 단봉초등학교(1951년 개교)를 지나 새롭게 조성된 아파트단지를 끼고 좌측 안동포(安東浦)로 접어들면 당산이 나오는데 (현재 고가도로 공사 중) 그곳에 왕길동의 소나무가 자리해 있다(오류동 산 27-1). 이 소나무는 수령이 약 300여년으로 추정되며 그 높이가 20여m이고 나무 둘레가 3m나 되는 오래된 소나무로서 마치 용의 비늘을 두른 모습으로 밑둥에서 두 갈래로 나뉘어 신성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으나 보호수로는 지정되지 않았고 마을의 광주이씨(廣州李氏) 문중의 종손사유지로 문중에서 보호 관리하고 있다.


  이 소나무는 400여년 전 조선 선조(先祖)때, 훗날 도승지에 추증된 광주이씨 중시조 이언(李彦)공이 이곳 왕길동(대촌)에 처음 입향하여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를 시작할 시기에 서장관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올 당시 소나무를 가져와 심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이 소나무에는 송충이가 앉지 않아 신성시하며 인근 8개 부락의 당산목으로 보존해 오고 있다. 일설에는 임진왜란 당시 고씨(高氏)들이 오류동 및 왕길동 8개 부락에 고르게 거주하여 ‘고잔8동’이라고 불렸다고도 하는데, 고씨들이 중선 3척을 건조해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의 양 난을 피해 중국으로 피난하던 중 선박이 난파하여 이 마을에 세거를 시작했다고 광주이씨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까지 이씨문중에서는 입향조가 심은 뜻을 기리기 위해 유교형식으로 매년 음력 10월 셋째주 일요일에 소나무에 제물을 차려놓고당제를 지냈다고 하며 그 후 김포지역에서는 최초로 한동안 미국 선교사의 선교 영향이 크게 작용해 중단되었다고 한다. 이 소나무를 처음 심은 광주이씨 중시조 이언 공의 묘역은 백석산 동남쪽 500여 미터 지점의 광주이씨 선영에 자리해 있다.


  또한 이 당산(아파트 뒷산)에는 안동포 부락의 ‘당집’이 얼마 전까지 있었고 1992년을 마지막으로‘ 안동포풍어제’가 치러졌다. 현재 안동포는그 포구의 모습은 사라지고 바닷가 옛 마을에 두리물(용두물)을 중심으로 마을이 현재에도 남아있다. 과거 이곳은 풍성한 어획고로 마을이 번창했던 포구로서‘ 조기 건조장’이 있었던 연유로 아직도 ‘조구내리’라는 소지명이 남아있기도 하며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진 토끼섬을 중심으로 천일염전(대흥염전, 인포염전, 경희염전)도 있었던 바닷가 마을이었다.


  현재 왕길동은 신도시가 들어서 정답던 옛길은 아스팔트로 바뀌고 크고 작은 규모의 공장들이 들어차 옛 모습을 잃고 말았지만 당산에 있는 소나무만은 그 옛날 왕길동의 모습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화되는 마을을 지켜보며 주변의 다른 나무들과 사뭇 다른 파란 솔잎을 사시사철 피우며 굳건히자리를 지키고 있다.


  소나무는 우리 모두의 고향 친구이며 어린 시절 일상생활에서 늘 함께 살아온 친밀한 동반자와도 같다. 전국의 그 어느 곳에서나 흔히 만나는 소나무이지만 저마다의 고향을 떠올릴 때면, 늘 추억어린 옛이야기 속의 정겨운 모습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우리 고장의 지정보호수들은 물론 산재한 지정받지 못한 노거수들이 점차 개발과 편리를 위해 하나하나 그 자리를 내주게 되는 현실에서, 좀 더 많은 관심 속에서 체계적으로 보호되고 관리되어 우리들 마음 속의 영원한 고향으로 남아있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Green서구 제 207호 

인천서구문화원장 박한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