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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 서구 향토역사순례 43탄, 조선시대 신도비와 인천시 유형문화재 32호 심즙 신도비




인천 서구 향토역사순례 43탄, 조선시대 신도비와 인천시 유형문화재 32호 심즙 신도비




  여러 기회를 통해 고려와 조선시대의 유명한 인물의 묘에 가는 경우가 있다. 때때로 묘 인근에 높이가 2미터에 이르는 커다란 비석을 보았을 수도 있다.이 비석은 신도비(神道碑)라고 하며 왕 또는 고관의 무덤 앞이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 워 죽은 이의 사적을 기리는 비석이다. 신도(神道)라는 말은 사자(死者)의 묘로(墓路) 즉 신령(神靈)의 길을 의미한다. 




  신도비는 중국 한대(漢代)부터 종2품(從二品) 이상의 관직에 있었던 이들의 무덤 근처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운 비석으로 대체로 무덤의 동남쪽에 남쪽을 향하여 세운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록상으로 고려시대부터 신도비를 세운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왕릉이나 2품 이상의 관직에 한하여 신도비를 세울 수 있었다.


  신도비의 내용은 사자(死者)의 공적을 기록한 것이 대부분이며 비문을 작성한 이와 신도비의 주인공의 관계는 대체로 문인(門人)이나 후손으로 구분할 수 있다. 신도비의 상단(上段)에 가로쓰기를 한 글자는 이를 제액(題額)이라 하며 전서(篆書)로 쓰고 비제(碑題)는 비의 전면 우측에 상하로 쓰고 있다. 신도비의  제액은 크게 쓰지만 비제는 본문 글씨와 크기가 같다.


  또한 제액은 간단한 시호(諡號)만 쓰는 경우와 증직(贈職) 및 실직(實職)을 쓰는 경우가 있고, 실직만 쓰는 경우, 증직만 쓰는 경우, 증직과 실직을 쓰고 호(號)를 첨가하여 쓰는 경우로 분류할 수 있다. 비제는‘유명조선국(有明 朝鮮國)’이 머리에 쓰이고 증직·실직·시호 등을 쓰고 마지막에는 신도비명병서(神道碑銘幷序)로 끝난다. 비제를 비 전면 우측에 쓰고 다음 행에는 글을 지은사람, 그 다음은 전자(篆者)를 쓴 사람이 기록된다. 본문은 4째 행부터 시작되는데 이는 조선시대의 통일된 형식이다.


  우리 인천 서구 공촌동 산38 청송 심씨 묘역에는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32호로 지정된 심즙 신도비가 있다. 조선 인조때의 문신인 심즙(1569-1644)의 자는 자순(子順), 호는 남애(南崖),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7살에 시를 써 세상을 놀라게 했고 28세인 1597년(선조 30)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형조· 공조· 이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인조가 공주로 옮겼는데 왕을 호위한 공으로 호종공신(扈從功臣)이 되었다. 심즙의 묘는 본래 시흥에 있었으나 근래에 지금 자리로 이장하였으며, 신도비도 그때 옮겼다. 신도비는 높이 1.9m 너비 0.85m, 폭 0.53m의 크기이며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홍봉조가 썼으며, 유척기가 전(篆)을 하였다.




자료출처 : 인천광역시 서구사, 디지털충주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