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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 서구 향토역사순례 40탄 <경명현의 응방지 (鷹坊址)>





인천시 서구 향토역사순례 40탄 <경명현의 응방지 (鷹坊址)>




계양산(桂陽山, 해발 395m)은 인천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옛 부평도호부의 주산으로,증동국여지승람』등의 옛 기록에는 진산 또는 안남산이라 기록되기도 했다. 계양산의 정상에서는 서쪽으로는 영종도와 강화도 등 주변 섬들이, 동쪽으로는 김포공항을 비롯한 서울, 북쪽으로는 한강과 고양시, 남쪽으로는 인천광역시가 펼쳐진다. 또한 계양산은 고려시대의 대문호이자 정치가인 이규보가 거처하던 자오당 터, 계양산성과 중심성지 등의 국방유적, 명월사와 봉일사 터 같은 불교 유적 등이 있어 그 역사적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계양산 서쪽에는 지금은 서구 공촌동과 계양구를 있는 도로가 개설되었지만 옛 모월곶(서곶)과 부평을 잇는 경명현이 있었다. 경명현의 명칭이 처음 보이는 것은 1750년 경에 제작된 (海東地圖)』로 강로(江路) 및 송도길(松都路)과 통하며 조운이 통한다.”고 하여 경명현이 18세기 후반까지도 고려시대 이래로 개경(송도), 인천, 안산 등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조선시대에는 조운 운송로로 알려진 지리적 요충지였다.



1973년 편찬된 이고 산세가 깊은 경명현이란 지명을 설명하면서 “부평 구읍에서 계양산의 서쪽 기슭을 우회하는 8㎞ 달하는 긴고개가 있다. 속칭 도 하는 이 고개는 인천근방에서 가장 높고 긴 고갯길인데 이것을 경명현이라 부른다. 이 경명현은  지금도 원시모습 그대로 문명의 혜택을 입지 못하고 있는 곳인데 여기에는 예부터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유명한 의적 임꺽정도 이 계양산을 무대로 출몰하였다고 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경명현의 지명이 현재에도 이·경맹이’ 등으로 불려지는 것은 이곳이 매사육과 매로 사냥을 하던 곳이었고 원나라로 매를 보냈다는 뜻에서 시켜 산짐승을 잡았다’하여 붙여진 때문이다.


이렇듯 교통의 중심지이고 산세가 깊은 경명현에 고려 충렬왕 원년(1274년) 매사육과 매사냥을 전담하는 국가기관인 응방(鷹坊)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고려 초 매의 사냥과 사육을 맡아보던 관서인 응방은 전국적으로 설치 운영되었다. 임금이나 귀족층들의 매사냥은 당시 최고의 전통놀이였으며 부와 명예를 상징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당시 원나라에서 공식 승인한 응방의 규모는 전국 250호였고 전라도와 충청도·경상도에서 총 205 호의 응방호가 조성되었다고 전한다. 이를 관리하던 관청은 응방도감으로 전국의 응방을 관리했고 윤수(尹秀)라는 관리를 중심으로 왕의 측근세력 등을 통해 전개된 것으로 기록되어 응방설치가 충렬왕의 권문세족에 대응하는 왕권 강화의 한 수단으로 삼았을 것이라는 설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다. 『고려사』등의 기록에 의하면 원나라는 응방을 통해 원나라 출신의 응방자 50인을 안남(安南, 지금의 부평)으로 이전 설치하였고, 충렬왕은 친히 경명현 매방을 방문하여 사냥을 다섯 차례나 했다고 전하며 이때 지명을 길주목(吉州牧)으로 승격시킨 기록도 남아있다. 


그 후 조선조에서도 매사냥은 지속되었고, 매사냥 애호가로 잘 알려진 세종대왕은 명나라에서 요구한 말 2만 5천 마리의 조공을 해동청 매 15마리로 대신하였다는 사실도 있다(응사 박용순의 증언). 고려시대 혹은 이전 고대부터 전통이 이어져 온 우리의 매사냥은 오래된 역사와 전통이 인정되어 2010년 11월에 유네스코 세계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되었다. 최근 들어 각 지자체마다 향토의 특성을 살린 수많은 축제가 개최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서구 공촌동에 있었던 경명현의 응방 설치 사실은 우리의 전통 매사냥의 역사적 배경이나 문화의 전통성 계승차원에서 지역문화 정체성 함양을 위해 우리 고장 인천 서구에서 재조명하고 계승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면 하는 의미에서 다시 살펴 보았다. 




Green서구 제216호

인천서구문화원 원장 박한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