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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서구, 만나고 싶은 서구

인천시 서구 향토역사순례 28탄, <대곡동 두밀마을 은행(銀杏)나무>






인천시 서구 향토역사순례 28탄, <대곡동 두밀마을 은행(銀杏)나무>




  은행나무는 병충해가 없으며, 여름에는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하고, 가을에는 그 빛을 발하여 은행잎의 노란 단풍이 절정에 이를 때면 추수 직전의 황금들녘의 벼와 함께 가을의 풍요를 담아내어 보는 이들의 발걸음과 마음에 여유를 준다. 또한 열매는 식용과 약용으로 사용되어 예로부터 정자목ㆍ풍치목, 가로수로 많이 심어 왔다. 중국에서 전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은행나무는 살아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중국 등지에 널리 분포해 있다.


  예로부터 선비들은 은행나무 밑에 단(檀)을 쌓고 학문을 연마하였고 향리의 학동들을 가르쳤는데, 그 연원은 중국 산둥성(山東省)에 있는 공자(孔子)가 제자를 가르치던 행단(杏檀)이다. 우리나라에는 청백리로 이름을 남긴 맹사성(孟思誠)이 제자를 가르치던 맹씨행단이 유명하다. 또한 선비들이 학문을 연마하던 향교에도 공자를 상징하는 은행나무를 반드시 심었다. 


  그리고 오랜 역사를 지닌 사찰에도 은행나무가 있는데, 경기도 용문사에는 신라의 마의태자가 심었다 하기도 하고 신라 의상대사가 지녔던 지팡이가 자랐다고도 하는 수령 1,110년의 동양에서 가장 큰 은행나무가 있고, 강원도 영월의 수령 1,200년의 은행나무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전역에 수백 년 된 은행나무들이 많이 있다.


  우리들이 거주하는 서구에도 오래된 은행나무들이 있는데 대곡동 두밀마을, 심곡동(인재개발원), 시천동, 불로동(마산마을) 등에 수백 년 향토의 역사와 정서를 간직하고 있는 많은 은행나무들이 그것들이다.




  특히 검단 대곡동(두밀마을)의 은행나무는 마을이 형성되면서 선조들이 마을 입구와 중심에 나무를 심었고 마을제 등의 주요 행사가 있을 때는 이곳을 중심으로 모여 주민들의 소통의 장 역할을 하였다. 두밀마을 중심에 있는 분틀메 남쪽 아랫말(대곡동249)에 위치해 있는 은행나무는 수령이 600년이 되었고, 높이가 20m, 둘레가 6m로 인천시 보호수(4-8-1호)로 지정되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풍요롭고 농사가 잘 되던 마을이 어느 날부터인가 농지가 메마르고 거칠어져 마을 주민들이 고통과 슬픔에 잠겨 있었다. 이때 마을을 지나던 고승에게 간절히 부탁을 드리며 그 해결책을 청하니 말없이 지니고 있던 지팡이를 꽂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 후 지팡이에 싹이 트고 메말랐던 땅에 물길이 뚫리고 다시 농토가 기름지게 되어 농사가 잘 돼 풍요로운 마을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 후부터 1980년대까지 마을에서는 가현산 삼형제 바위를 당산 할아버지로, 마을의 은행나무를 당산 할머니로 모셔 당제를 지내왔다고 한다.


  이런 전설을 간직한 두밀마을의 역사 또한 오래되어 청동기 시대의 대표 상징물인 지석묘와 젓석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약 550년 전부터 반남박씨의 세거마을이 시작되었는데 이곳에는 박정, 박동선의 신도비 등이 있는 반남박씨 묘역(인천시지정기념물 제 59호)과 '밀양당씨 정렬비'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또한 이곳의 고유지명에는 마을의 의미를 함축하는 지명들(분틀메, 달안뫼, 감두리산, 말무덤, 청룡부리, 양달말 뒷산인 계봉산, 박가물) 또한 찾아볼 수 있다.


  마을의 보호수는 한여름에는 주민들의 휴식ㆍ소통의 장으로서, 지나가는 나그네들에게는 쉼터와 문화교류의 장으로서 그 자리를 지켜왔으며 두밀마을의 은행나무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최근 도시화의 영향으로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이 자기 자리를 점차 내어주고 있다.


  이곳에도 머지않아 마을 보호수의 존재 가치가 사라지게 될 심정이다. 서구의 보호수에 담긴 전설이나 가치를 되짚어보면서 보호수 혹은 오랜 수령의 나무에 대한 대책을 기대하며 두밀마을 은행나무에 대해 소개해본다.




/Green서구 제204

인천서구문화원 박한준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