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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서구, 만나고 싶은 서구

인천시 서구 향토역사순례 4탄, 축곶봉수를 찾아서


인천시 서구 향토역사순례 4탄, 축곶봉수를 찾아서 


현재는 그 이름조차 생소하게 들리는 축곶봉수는 가정동 산54번지 일대, 나지막한 축곶산 정상에 위치해 있는 조선시대의 연변봉수(沿邊烽燧)이다.


축곶봉수가 자리한 지역의 지형은 계양산과 천마산, 원적산이 남북으로 길게 해안을 따라 형성되어 있고 이곳에서 발원한 심곡천(深谷川)과 공촌천(公村川) 그리고 시천천(始川川)이 바다로 흘러 자연스레 바닷물이 육지 깊숙이까지 들어왔던 곳이었다. 따라서 배가 갯골을 따라 육지로 들어올 수 있는 지역이어서 과거 해안방어의 중요지점으로 인식되어 왔었다.





역사적으로도 인근 지역은 선사시대부터 거주와 생활터전으로 활용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 예로 선사시대부터 청동기시대를 거치면서 해안을 끼고 남긴 유적과 유물들이 현대에 들어서 각종 지역개발로 인해 발견되어 왔다.


검단 대곡동의 청동기 유적지인 지석묘 군락지와 인근 지역에 산재되어 있는 지석묘들과 원당지역의 선사시대 유적지가 발굴되고 있는 점은 인근지역의 거주조건이 적합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최근에는 서구 연희동 지역에서 삼국시대 것으로 추정하는 유물, 유구가 천여점이 발굴되었고 김포 양촌 한강 주변 신도시에서도 백제시대유물들이 발굴되었다. 그동안 서구지역의 선사시대 주거를 입증할 근거자료들이 없었지만 기록으로만 전해내려오던 서구일대(모월곶면)에 수백호의 주거지(구슬역, 구슬원, 장모루)가 있었다는 점과 경서동 녹청자 도요지 등은 우리 서구 일대의 해안에 선사인들의 생활무대가 광범위하게 분포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는 다른 면에서 해안에 인접해있어 해상으로의 교통이 원활하니 외래선(왜적)의 침입 또한 빈번한 지역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 지역의 해안선은 한강으로 통하고 서울(한양)과의 거리가 인접하여 방어지역으로서 중요한 거점 임을 역사적, 지리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고려사 문헌에 고려말 우왕4년(禑王4년,1378), 왜구의 침략이 인천과 부평 일대에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임진, 병자년양난(兩亂)에 부평향교의 병화 기록과 한양의 방어를 위한 계양산 중심성(衆心城)을 비롯해 연희진과 그 소속포대(砲臺)가 있었다는 기록을 보아 이 지역의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해안의 왜적 침입을 서울(한양)에 급히 알리기 위해 가정동 축곶산과 서구 오류동(봉화촌) 백석산(白石山)의 봉수에서 봉화를 피워 알렸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부평부읍지' 등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에 봉수는 주요한 통신수단이었으며, 평상시에는 항로역할을 하던 중요시설의 요충지였다. 또한 고종3년(高宗3년,1866)에서 구 경서동 금산(호두산, 虎頭山)봉수를 병인양요 때 구축하였다고 전하는데 이곳의 해안선이 바다로 돌출되어 있어 시야가 탁 트인곳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서구지역은 해안을 끼고 있던 지리적 위치로 봉수를 구축하고 관군들이 바다를 응시하며 왜적의 출현을 미리 알리고 사신들의 항로와 배의 위치를 알려주던 시설이있던 곳이었지만 세월이 흘러 그 위치마저 찾기 어렵고 이름조차 잊혀져가며 갯골은 메워지고 해안은 간척사업으로 육지화되어 청라국제도시가 들어섰으니 그 축곶봉수대의 이름과 역할은 역사로 남고 그 흔적은 돌무더기만 남아 그 당시의 중요성은 기록으로만 전해지고 있다. 현재 이 곳 봉수대에서 바라보던 서구 앞바다는 높은 건물들이 시야를 가려 오가는 배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과거의 역사가 있기에 현재의 우리가 있으며, 지역의 향토 문화유산인 당시의 축곶봉수에 고스란히 배어 있는 그 의미와 역사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어 우리 고장에 대한 진한 애향심을 되새길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인천서구문화원장 박한준

(자료 : Green 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