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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서구 향토역사순례 34탄 <경서동 난지도(蘭之島)의 소나무 숲을 찾아서>




인천 서구 향토역사순례 34탄 <경서동 난지도(蘭之島)의 소나무 숲을 찾아서>



  계양산의 서쪽에 위치한 경서동은 예전에는 부평부 모월곶면 소속으로 고잔(古棧), 범머리(虎頭), 심포리(沈浦里), 빈정천(濱汀川) 등 네 개의 자연취락이 모여 형성된 마을이다. 그리고 앞바다에 난지도, 청라도, 세어도 등의 섬들이 모여 있었다.


  1871년(정조13)의 호구총수에 고잔리와 난지도는 고잔리 법정동으로 기록되어 있고 당시 경서동 일대는 이씨왕조의 봉토로 왕조 종친들의 토지였으며, 인근 섬에는 궁중의 목재를 키우던 소나무 양목지가 많았다. 경서동의 소지명으로는 곰말, 넘말, 앞말, 난점, 범머리, 사깃골 등을 통틀어 고잔, 쑥데이고잔, 쑥뎅이라고 불렸는데, 이곳 쑥의 뛰어난 약효가 국내뿐 아니라 중국, 일본에까지 알려졌기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또한 마을 인근에 청라도를 비롯한 범염, 까투렴, 노렴, 난지도 등의 섬들이 자리해 있었지만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섬들이 사라지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변해왔다.




  난지도(난점, 난지염)는 예전 금산(범머리, 호두,버머리)의 서쪽에 자리해 있었으며 그 사이로 큰 갯골이 깊이 나 있어 녹청자요지(국가사적 제211호)를 거쳐 검암동 해머리방죽을 지나 시천동 꽃뫼까지 배들이 왕래를 했었다. 이 갯골은 금산 뒷편으로 예전에 심포리(沈浦里)로 불렸으며 고려시대에는 수군기지가 있었고 빈정천의 과기평에도 군인들의 훈련장이 있었으며 금산에는 병인양요 후 빈번한 이양선의 침몰로 인해 망루와 연변봉수가 있었다고 전한다. 또한 금산 동쪽에는 조선 세종임금 때 대제학을 지낸 류사눌(柳思訥)의 묘역이 있다. 최근 도시화 개발 과정에서 신석기시대의 패총이나 어망추, 빗살무늬토기편, 회청색 경질토기, 백자편, 기와편, 자기편 등이 이 지역에서 수습되어 고대유물의 분포지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과거 난지도는 경서동 본마을 서쪽에 자리했는데 이곳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 주민들이 함께 했던 도당굿과 풍어제를 지내왔다. 당시만 해도 40여 호의 집과 10여 척의 어선이 있었고 수확한 어패류를 마을의 아낙네들이 인근 마을로 나가 곡식으로 교환하거나 팔기도 하며 생활해 왔었다고 한다.


  당시 경서동 본말 도당산에서 음력 10월에 지내던 도당굿과는 별도로 섬에서는 당제도 지내고 출어 전에 선주들이, 현재 일부 남아있는 난지도 소나무 숲에서 용왕신께 풍어와 무사귀환을 위한 풍어제를 지내 왔었다. 당제와 풍어제를 준비하기 위해 당주를 뽑고 제비를 마련해 이곳 소나무 숲에 제단을 마련하고 인근 고잔의 무속인을 초청해 2박3일 동안 당제를 지냈고 배에서 용왕제도 올렸다. 1970년대까지 이어오던 풍어제는 간척사업으로 어선의 출어가 중단되면서 마을제 형식의 당고사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1980년대 초 인근에 쓰레기매립지가 들어서고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공항철도 등의 건설로 인해 난지도는 본 모습을 잃었고 남아있던 마을 주민들은 인근지역으로 이주를 하고 섬도 거의 없어졌으며, 당제를 지내던 소나무 숲도 일부분만이 남게 되었는데 현재 그 터가 국제골프장 서쪽끝과 고속도로 사이의 야트막한 산자락에 해송(海松) 30여 그루의 군락과 함께 남아있다.


  아쉽게도 이제는 경서동의 난지도라는 섬의 정겨웠던 모습은 옛 추억 속에만 남아 원로들의 구전으로만 전해지게 되었고, 그나마 얼마 후면 난지도라는 섬을 기억하는 이도 없을 것 같아 관련 문헌들을 살펴 난지도의 소나무 숲에 담긴 옛 이야기를적어보았다.




박한준 인천서구문화원장

Green 서구 제21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