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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서구 풍경 27탄! <인천 서구 가좌농민학교>




사진으로 보는 서구 풍경 27탄! <인천 서구 가좌농민학교>




  이 사진에 대해서는 특히 남다른 감회가 더오른다. 고등학교 1학년이던 1963년 늦봄쯤, 교사(校舍)의 흙벽을 시멘트 블록으로 개량할 때 심부름을 했었던 기억 때문이다. 심부름이라면 아주 대단한 역사(役舍)에 참여했던 것처럼 들리지만, 실은 종이쪽지 하나를 전하러 작업 현장에 들른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그 종이쪽지가 이 학교의 담벼락을 세우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자부하니 '감회' 운운하는 것이 그다지 허풍스럽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무슨 시간이었는지는 기억이 명확하지 않으나 셋째 시간 학습이 막 시작되려 할 때 담임이신 심재갑(沈載甲) 선생님께서 교실 앞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그리고는 과목 선생님과 짧게 이야기를 하시고는 나를 지목해 복도로 불러내신 것이다.


  교실 밖으로 나온 내게 선생님은 종이쪽지를 건네주시면서, 이 것을 가좌동 농민학교 현장으로 가서 작업을 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전하고 오라는 분부를 내리셨다. "꼭 이대로 해야 된다."는 말을 강조해 전하라는 당부도 빼놓지 않으셨다.


  종이에는 시멘트와 모래와 물의 배합 비율이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종이쪽지는 시멘트 벽돌을 제조하는 필수 요소를 적은 중요 문서인 셈이다. 나는 선생님께 꾸벅 절을 올린 뒤 한달음에 가좌동으로 내달렸다. 버스가 워낙 뜨막하게 다니는 통에, 틀림없이 버스 비용도 주셨을 테지만, 나는 그냥 동인천을 거쳐, 헐떡고개를 넘고, 다시 인천교를 건너, 무슨 밀서라도 전하러 가는 사자(使者)처럼 달렸다.





  사실 이 비슷한 선생님의 심부름은 그 후 한 두 번 더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 그때 골치 아픈 수업 시간을 빼먹고 공기 맑은 염전둑길과 논밭이 펼쳐진 시골길을 달리고 걷고 하는 것이 얼마나 상쾌하고 행복했었던가. 생각해 보면 전화가 없던 시절, 그리고 시멘트 같은 건축 자재도 별로 흔치 않던 시절의 이야기 이다.


  각설하고, 새롭게 단장한 이 농민학교 건물은 그 후에 보았다. 중등반이었는지 나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이는 사람들이 벽돌을 찍고 있었다. 지금은 대로와 아파트, 신축 학교 건물들이 들어서 그 위치조차 가늠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은 여든이 넘으신 노선생님의 모습이다.


  물론 가난 때문에 못 배우는 청소년을 위해 교사를 짓고, 가르치시고 한 그것만이 아니다. 벽돌 제조 비율 하나도 세심히 챙기시던 그런 정성과 치밀하신 인품이다. 아마도 당신의 선친 고 심운섭(沈雲燮) 선생의, 한 대(代)앞서 펼치신 브나로드 운동의 정신이 선생님께 흘러내린 결과일 것이다. 사진을 들여다보며 이런 외람된 생각도 적어본다.




/Green 서구 제204호

김윤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