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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서구 향토역사순례 26탄 ‘시천동 보호수의 수난’





인천 서구 향토역사순례 26탄 ‘시천동 보호수의 수난’




  시천동은 현재 검암동에 속해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부평군 모월곶면, 한때는 황어면(黃漁面)에도 속하기도 했다. 또한 시천리는 시시내라고도 불렸는데, 그 유래는 계양산 북쪽의 물줄기가 시작한 곳이라 하기도 하고, 원래 이 지역이 깊은 골짜기 안의 갯골이었으나 보와 둑을 쌓아 논을 만든 갯골에서 시내(川)가 비로소 시작된 곳이라 해서 불렸다고도 전한다.


  예로부터 물이 풍부하고 땅이 기름져 농사가 잘되고 인심이 좋은 시천동은 시시내, 점말, 안골, 윗말(본마을) 등 자연촌이 모여 생긴 마을이다. 본마을의 가장 끝자락에 갯골이 있었고, 점말에는 포구가 있어 옹기를 구어 배로 나르고 팔던 옹기점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 밖에 마을 앞에는 꽃뫼라 불리던 화산(花山), 삽작골, 꽃뫼골, 계동골(성황당)이 있었고, 꽃뫼에는 청자를 굽던 가마터(부엉바위)가 있었다고 원로들은 증언하고 있다.


  또한 시천동 마을을 감싸고 있는 오룡산(五龍山)은 계양의 둑실동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다섯 갈래의 산줄기이다. 마을 앞쪽 꽃뫼는 고려조에 개경(開京)으로 향하던 길목의 여각 구슬원(球瑟院)이 있었고, 당시 격구(말을 타고 공을 치는 운동)경기와 비파, 거문고를 켜던 소리가 들릴 정도로 성황을 이루어 꽃과 같이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해서 생긴 지명이다. 이곳 아래쪽으로 장모루(長牟樓)와 검암동의 발아장(바라뫼)은 국내뿐 아니라 중국에도 잘 알려진 한약재 '사자발쑥'이 유명하였고, 우시장이 번성했던 오일장이 있었다고 전한다.


  유서깊고 아름다운 이 마을은 많은 인물들을 배출한 진주 류씨의 집성촌이었다. 조선후기 1837년(헌종3) '가정별업도'를 지어 과거에 급제하여 호조참외와 대사간을 지낸 계북 류태동(柳泰東, 1792~1864), 근대의 심남(心南)류희진(柳熙晉), 검여(劍如) 류희강(柳熙鋼), 류인무(柳寅茂)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서구의 어느 마을이나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는 수호목이 있는데, 시천동 지역도 보호수로 지정된 유서 깊은 노거수들이 있다. 하지만 이 보호수들은 자연환경의 인위적 변화와 우리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아라뱃길 가람터 옆(시천교)공원으로 이전해 어렵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시천동의 보호수로는 서당이나 서원 인근에 심던 회화나무(槐花)가 있다. 이 회화나무는 원래 시천동 56-4번지에 위치했었으며 수령 약 250년, 높이 22m, 둘레 2.5m로 그 수형이 아름다웠다. 같은 지역에 역시 수령 약 250년에 높이 20m, 둘레 2m 가량의 느티나무도 있었다.


  또한 이곳에는 수령이 200여 년에 높이 15m, 둘레 0.4m의 인천에서는 많이 볼 수 없는 산수유나무도 있는데 이 나무는 주로 중부 이 남 지역에서 자생하며 해열제나 강장제로 열매를 사용한다. 이 밖에도 시천동 산 109번지에는 수령이 300년이 넘고 높이 32m에 둘레 2.7m 가량의 은행나무도 있어 마을의 오랜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2000년대 초 아라뱃길(굴포천방수로공사) 공사로 인해 마을에서 옮겨져 수많은 공사차량이 오고 가는 공사현장 한가운데 쓸쓸히 자리해 있을 당시만 해도 그 모습은 당당하고 수형이 아름다워 그런대로 볼품 있었다.


  현재 시천교 밑 가람터 공원에 앙상한 가지에서 싹을 띄우며 자리해 있는 은행나무ㆍ회화나무ㆍ느티나무ㆍ산수유나무는 마을의 정신적 지주역할에서 밀려나 그 옛날 영화로웠던 시대를 뒤로하고 힘겹게 생존해 가고 있는 것이다.


  현재 보호수 앞에는 간단한 안내문이 적혀 있지만 몇몇 시천동 지역의 원로들 외에는 많은 이들이 이 나무들이 겪은 수난을 잘 알지 못한다. 또한 보호수들이 옛 마을에서 이곳으로 오게 된 내력이 안타까워 그 역사를 기술해 보며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보호수만큼이나 오래된 시천동의 역사와 문화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소개해보았다.





/ Green서구 제202호

인천서구문화원 원장 박한준